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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 50주기, 오늘의 전태일들을 위한 전태일 3법
이도경 기자 | 승인 2020.12.04 15:15|(1165호)
전태일 열사 동상 서울시 청계천 버들다리에 설치된 전태일 열사 동상의 모습이다. 사진/ 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올해는 전태일 열사 50주기이다. 1970년 11월, 22살 청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 항거했다. 그의 희생은 우리나라 노동운동 발전과 근로환경 개선의 시발점이 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의 노동환경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그의 당부가 무색하게도 사회 곳곳에 있는 노동자들의 삶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전태일은 누구인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 열사의 집안은 가난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구두닦이, 신문 배달, 우산 장사, 껌팔이 등을 하며 근근이 돈을 벌었다. 이후 아버지의 재봉 기술을 배워 서울시 평화시장에서 봉제노동자로 일했다. 
  전태일 열사는 열악하고 불합리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1970년 11월,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으며 우리나라 노동운동 발전의 도화선이 됐다. 
  지난 12일, 문재인 대통령이 전태일 열사에게 국민훈장 중 1등급에 해당하는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노동인권 개선 활동을 통해 국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고인의 공을 되새기고, 정부의 노동존중사회 실현 의지를 표시하기 위함이다. 노동계 인사 최초로 무궁화장이 추서된 것에서 그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족적을 남겼는지 알 수 있다. 

전태일 열사 무궁화 훈장 추서식 지난 12일 청와대에서 전태일 열사 무궁화 훈장 추서식이 진행됐다. 사진/ 청와대 제공

  평화 없는 평화시장
  전태일 열사의 일터였던 평화시장 일대는 의류 제조업체와 상가가 밀집한 곳이었다. 3만여 명의 직원이 일할 만큼 규모가 컸지만 작업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노동자들은 창문 하나 없는 비좁고 어두컴컴한 다락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했다.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가며 철야 작업을 하는 날도 많았다. 비좁은 공간에서 일만 하다 보니 노동자들의 몸은 성할 리 없었다. 전태일 열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70년에 대부분의 노동자가 신경성 위장병, 신경통, 기관지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외에도 소화불량, 영양실조, 생리불순을 겪었고, 겨울에는 난방시설이 없어 동상에 걸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그들은 병원에 갈 시간도, 돈도 없었기에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당시 임금 지불은 도급제로 이뤄졌다. 이는 월급제와 달리 작업량에 따라 임금을 지불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사업주들은 한 단위당 얼마를 지급하겠다는 뚜렷한 기준과 합의를 미리 마련하지 않았다. 일이 다 끝난 후에 사업주가 재량껏 임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작업량에 비해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임금 수준 또한 턱없이 낮았다. 어린 여공들이 하루 14시간 넘게 노동하고 받는 일당은 겨우 70원 남짓이었다. 당시 껌 한 통이 10원이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마저도 체납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왕복 교통비를 제외하면 남는 돈은 극히 적었다. 

  바보회와 삼동회
  전태일 열사는 1968년 아버지를 통해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이후 1969년에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결성했다. ‘바보’는 그동안 근로조건이 법으로 보장돼 있음에도 혹사와 부당한 대우를 견디며 일해온 평화시장 일대의 모든 노동자를 의미한다. 다음 해인 1970년에는 투쟁 조직인 삼동회를 조직했다. 바보회가 노동 당국에 진정과 호소를 했다면, 삼동회는 노동 환경의 실태를 세상에 폭로하고 투쟁하는 역할을 했다.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실태를 조사한 설문지를 들고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갔다. 그들이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개선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은 사업주와 한패였다. 평화시장의 현실을 알고도 침묵했으며, 오히려 경제적 보상을 내걸며 노동운동을 회유했다. 이 당시 국가적으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필두로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시작됐다. 정부의 관심은 경제성장에 있을 뿐, 노동자의 처우개선과 복지는 뒷전이었다.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 수 연도별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 추이다. 인포그래픽/ 이도경 기자

  노동환경의 현주소
  전태일 열사가 떠난 지 50년이 지났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비보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설움 담긴 눈물은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는 OECD 가입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를 기록했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2,020명,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 수는 855명으로 드러났다. 과거보다 크게 감소한 수치이지만 여전히 하루에 2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산업재해보상보험 범위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특수고용노동자와 1인 자영업자 등이 포함되지 않은 수치다. 
  전태일 열사가 준수하라고 외친 근로기준법은 헌법에 따라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고 향상하기 위해 마련된 법이다. 이 법에서는 근로계약, 임금, 근로시간과 휴식, 안전과 보건,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재해보상 등의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는 무수히 많다.
  지난달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직장인 1천 명을 대상으로 근로기준법에 관련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10명 중 4명은 근로기준법이 일터에서 지켜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한 응답은 비정규직일수록, 비사무직일수록, 5인 미만 사업장일수록, 급여가 낮을수록 높은 수치를 보였다. 

  전태일 3법
  아직도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많다. 지난 9월,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추진된 이른바 ‘전태일 3법’과 관련한 국민동의청원이 1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논의 중이다. 전태일 3법이란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을 개정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는 것을 말한다. 
  근로기준법 개정
  「근로기준법」 개정 목적은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는 것에 있다. 근로기준법 제11조에는 ‘이 법은 상시 5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한다’고 명시돼 있다. 다르게 말하면 5인 미만이 근무하는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원 2명을 두고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이 있다면, 그 카페는 5인 미만 사업장이 되므로 근로기준법 적용대상이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면 사업주는 노동자를 정당한 이유 없이 하루아침에 해고할 수도 있고, 임금을 삭감할 수도 있다. 또 주 52시간 근무와 육아휴직을 보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 부당한 일이지만, 법이 노동자를 보호하고 있지 않다.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 수는 약 358만여 명이다. 이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근로기준법 11조의 개정이 필요하다. 
  노조법 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조법)」 제2조에 따르면 근로자의 정의는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임금∙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이다. 이 범위에 해당하는 노동자는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현행 노조법이 규정하는 노동자의 범위는 매우 좁다. 346만 명의 간접고용노동자와 220만 명의 특수고용노동자는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특수고용노동자는 사업주에 귀속되지만 1인 사업자로 분류된다. 월급이 아닌 일한 만큼의 건당 수수료를 받기 때문이다. 퀵서비스 기사, 택배 기사,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등이 특수고용노동자이다. 간접고용노동자는 원청기업에 용역, 파견, 하청 등의 형태로 고용돼 일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노동3권이 없기 때문에 특정 사업주와 회사에 종속되면서도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도, 교섭이나 파업을 할 수도 없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2016년에는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김 군이, 2018년에는 화력발전소에서 야간근무를 하던 노동자 김용균이 사망했다. 두 고인의 공통점은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것이다. 2인 1조 작업 규칙이 있었지만 촉박한 시간과 회사의 인력수급 문제로 위험하게 혼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우연이 아닌 구조의 문제이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을 무시하고, 위험한 일을 하청업체에 떠넘기며, 산업재해 사망사고가 일어나도 솜방망이 처벌만 받을 뿐이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사업장 등에서 인명사고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 경영 책임자, 기업에 형사책임과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법이다.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기업이 부담해야 할 사고처리 비용이 안전관리 비용보다 더 많이 들도록 해 기업이 안전한 노동 환경을 조성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입법 과정은 순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산업재해 발생 시 사업주를 처벌하는 법이다 보니 경영계의 반발이 심하기 때문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 이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는 것은 과잉 입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 법안이 경영 책임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내몰며 기업의 경영활동을 위축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태일 3법과 청년
  ‘노동자’로서의 삶은 학생인 우리에게 아직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듯하다. 우리 학교 사회학과 최인이 교수는 “학생들이 아직 한국 사회 노동문제의 중요성과 심각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며 “어딘가에 고용되기 위해 열심히 취업 준비를 하는 반면 정작 본인이 고용되면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또한 “학생들이 현재 입법 추진 중인 전태일 3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표명한다면 앞으로 변화되는 경제사회적 구조 속에서 위험한 노동의 문제가 해결되고, 다양한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실질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전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가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인이 될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남지 않았다. 우리는 훗날 프리랜서가 될 수도 있고, 특수고용노동자로 일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를 고용하는 사업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나의 가족이, 나의 친구가 당연하게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으며 살기 위해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정립하는 한 걸음이 필요한 순간이다.

 

이도경 기자  ehrud0825@o.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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