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만 뜨면 새로운 통신서비스와 기기들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호출서비스만해도 일반호출기능, 광역호출기능 등 다양한 호출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휴대전화서비스도 아날로그부터 디지털, PCS, 시티폰 등 그 종류를 세기도 힘들다.
 공급이 이쯤되면 수요도 이쯤되는 법. 불과 2~3년전만해도 호출기 하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신기할 정도였는데 요즈음은 휴대폰 · 호출기 쯤 하나 없는 사람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게다가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컴퓨터 통신은 아예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다시금 정리해야 할 정도로 빨리 보급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의사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혁명적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예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연락을 하기위해 며칠이 걸려 겨우 서신 한장으로 의사를 전달하였었는데, 이제는 멀리 해외에 있는 사람이라도 바로 옆에 있는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연락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곧바로 연락을 취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얼마나 편리해진 세상인가.
 그런데 이런 현실임에도 이상스럽게 ‘의사소통’이 예전보다도 안되고 있는게 또 지금이다. 굉장히 모순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데, 흔히 우리가 얘기하는 ‘세대차’란 말 속에서, ‘개인주의의 심화’란 말 속에서 쉽게 알 수 있다. 통신서비스는 나날이 발달해 우리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 주는데 정작 우리는 지금 ‘의사소통’이 안된다는 말이다. 그래도 예전엔 기성세대와 신세대 등으로 간다하게 구분되었고, 이것은 이집트의 피라밋에도 써 있을 만큼 어느 시대나 있는 필연적인 차이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몇시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도 세대차를 느낀다 한다. 물론 우스게 소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의사소통’이 얼마나 막혀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혁명적인 통신의 발달은 겨우 우리의 ‘의사소통’이 또래에서만 머물고 있다. 그것도 자기과 마음이 맞는 몇몇 사람들뿐인 또래들만 말이다. 언론에서 시도때도 없이 세대차니 개인주의니 하고 떠들지만 이젠 아예 무감각해질 정도다. 우리는 우리서로의 작은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주장으로만 꿈틀대며 살아가고들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억지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자기자신을 생각해 보라. 부모, 형제 그리고 선 · 후배 등 자신 주변의 사람들과 얼마나 많은 대화를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가를. 아마도 그러고 있다고 대답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테크톨로지 발달로 지구가 좁아지고 있다고들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혹은 이해심)도 좁아져만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김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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