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문학관에서

  소설, 에세이 등 문학에 여러 종류가 있지만, 시는 특히나 어려운 장르인 것 같다. 시가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바로 ‘길이’에 있다. 시는 길이가 짧아 읽는 데 시간이 아주 적게 걸린다. 그러나 시에는 단어에 담긴 의미와 시인이 살아온 배경, 가치관 등 수많은 요소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모두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소설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지만 내 머리에 남아있는 시는 몇 작품 되지 않는 것 같다. 기억나는 시 중 하나는 바로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다. 교과서에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를 그리고 밑줄을 그어가며 억지스럽게 문학을 공부하는 와중에 ‘껍데기’라는 단어와 단호한 말투가 꽤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올해는 신동엽 시인 타계 50주기다. 대전에서 약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부여군에 가면 생가와 문학관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현재는 복원 공사를 통해 단정한 기와집의 모습을 갖춘 상태다. 아담하고 평범한 생가에는 인위적으로 사람을 통제하는 안내 문구도, 띠도 없다. 덕분에 시인의 방 모습을 더욱 가까이서 보고 느낄 수 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와 나무집 냄새는 마치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줬다. 
  투박한 듯 현대적인 모습의 문학관은 아늑하고 알찼다. 문학관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바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신동엽 시인의 흉상이다. 날카로운 눈빛은 들어가는 순간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결연하고 엄숙해 보이는 표정과 만년필을 쥔 주먹에서는 그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두 번째는 시인의 육필 원고다. 항상 정갈하게 흰 종이에 검은 글씨로 프린트된 자료만 보다가 누런 원고지에 세로로 쓴 글자, 펜으로 휘갈겨 지워낸 흔적이 남은 원고를 보니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그의 유족이 기증한 물건들과 함께 여러 육필 원고를 보고 있자니 마치 신동엽 시인의 방을 구경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그가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껍데기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등 그의 주요 작품은 1960년대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2020년을 앞둔 지금 읽어도 마냥 옛날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960년대의 현실뿐 아니라 미래까지 내다보고 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사회가 과거보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게 보일지라도 언제나 다양한 주제를 두고 끊임없이 충돌하는 곳임은 분명하다. 
  대중의 인터넷 접근이 용이해지고 표현의 자유를 역이용하는 사람들 탓에 허위와 가식의 껍데기는 더욱더 많아졌다. 또한 오늘날의 개인들은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자신을 얽매고 갉아먹는 껍데기에 싸여 고통받고 있다. 껍데기는 가고 구름 한자락 없는 맑은 하늘 아래 향그러운 흙가슴을 가진 알맹이만 남은 세상의 도래를 기대해본다.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