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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이 된 한국의 서원을 다녀오다
이강우 기자 | 승인 2019.09.03 15:55|(1154호)

 지난 7월 6일 유네스코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회의에서 한국의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유네스코는 16~17세기 설립된 서원이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서원은 성리학을 논하는 교육 장소이자 선현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향시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앙과 향촌을 아우르는 권력기관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다수의 한국인은 여전히 서원을 ‘붕당의 소굴’, ‘향촌비리의 온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정말로 알아야 할 조선시대 서원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계승해야 할 보편적 가치란 무엇일까? 현재 전국에는 700여 개의 서원이 있다. 이 중 기자가 엄선한 3개의 서원을 통해 이를 탐구해보자.

주세붕 영정 보물 717호. 인물의 개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사진/ 소수박물관 제공

1. 소수서원
  서원의 시작
  1178년 남송 시기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가 남강군 지사로 부임했다. 주희는 과거급제에만 매달리는 국학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보고 명맥만 유지하던 백록동서원을 대대적으로 중건할 뜻을 밝힌다. “내가 옛 성현들이 사람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치던 뜻을 살펴보니, 모두가 의리를 연구해 그 자신을 수양한 다음 남에게까지 미치게 하라는 것이었지, 단지 글자를 익히고 문장을 공부해서 명성을 얻고 이익이나 취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의 학문하는 사람들은 벌써 이와는 반대이다” 또한 서원 운영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고, 학칙을 정해 서원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주희는 서원을 통해 출세가 아닌 인격수양의 학문을 구현하고자 했다. 이것이 서원의 시작이다.
  주세붕과 백운동서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안향의 사묘를 세우고 이듬해 1543년 백운동서원을 건립했다. 선현을 제향하고 유학자들이 모여 공부하는 ‘제향과 강학’의 기능을 조선에서 최초로 결합한 이는 주세붕이었다. 그러나 안향은 한국 성리학의 시조로서 문묘에 모셔진 데다 성읍마다 사당이 있고 관학인 향교가 이미 설립돼 있으니 사당과 서원을 새롭게 세울 필요가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주세붕은 주희의 고사를 들어 설명했다. “당시엔 금나라가 중국을 함락하여 천하가 피비린내로 가득했고, 남강지방은 계속된 큰 흉년으로 벼슬을 팔아 곡식으로 바꿔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다. 그 당시 위태로움과 곤궁함이 그토록 심하였는데도 주희가 세운 서원과 사당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늘이 뭇 백성들을 낳음에 사람이 사람다운 이유는 바로 교육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답변이 아니었다.
  소수서원으로 거듭나다
  주세붕은 백운동서원 입원자격으로 과거시험 응시 경험을 요구했다. 생원진사시 합격자가 1순위, 초시 합격자가 2순위였다. 주희와는 달리 서원을 과거시험 준비와 관료를 길러내는 인재양성소, 관학의 연장선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백운동서원은 ‘이 서원에서 공부하면 5년도 안 돼 모두 과거에 급제한다’고 회자될 만큼 유명세를 얻는다. 요즘으로 치면 강남 8학군이나 공무원학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세붕은 비록 주희의 서원 정신을 담지는 못하였으나, 관학의 교육 기능이 쇠퇴한 당시 사회에 새로운 형태의 학교를 세워 실질적인 성과를 올렸다. 이를 인정받은 백운동서원은 이름과 사액을 하사받아 소수서원으로 거듭나게 됐다. 

최치원 영정 무성서원에서 보관했던 영정. 정읍시립박물관에서 전시 중. 사진/ 정읍시청 제공

2. 무성서원
  최치원과 신잠

  1615년, 아직 임진왜란의 상흔이 사라지지 않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지역 양반들은 서원 건립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마침내 최치원과 신잠을 모시는 태산서원을 건립하니 무성서원의 시작이다. 최치원은 700여 년 전에 태산군 태수로 부임했다고 하며, 신잠은 70여 년 전에 태인현감으로 재임했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은 남북국시대 신라 경주 사량부의 6두품 출신으로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6년 만에 시험에 합격했으나 이미 병들어 농민반란에 시달리는 당나라에선 그의 뜻을 펼 수가 없어 귀국한다. 그러나 신라 또한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 신분체제와 국정의 문란함이 날이 갈수록 가중됐기에 외직을 청했다. 34세 때 태산군의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펼쳤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주민들은 성황산 서쪽 능선 아래의 월연대 아래에 최치원의 사당을 세우고 성황신으로 모셨다. 동국여지승람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치원이 스스로 서쪽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다고 했다.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장차 자기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쇠해가는 나라의 정국은 의심과 시기가 많아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드디어 외직으로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
  신잠의 본관은 고령이며 신숙주의 증손자이다. 23세 때 급제해 관직 생활 중 기묘사화로 인해 파직됐다가 신사무옥에 휘말려 17년간 유배된다. 귀양살이가 끝난 후 인재로 천거 받아 전라도 태인현 현감으로 부임한 신잠은 정성을 다해 고을의 예의를 일으키고 풍속을 고치며 학교에서 인재를 기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다음은 명종실록에 실린 관찰사의 보고다. “태인현감 신잠은 고을을 다스림에 청렴하고 간솔하며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구호정책을 크게 베풀어 다방면으로 노력함으로써 태인현이 구제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고을에서 와 구제를 받은 자도 5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논란이 일다
  태인의 양반들은 태산서원 건립 15년 후 태인의 향현인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을 추가로 배향했다. 이들은 서로 가까운 친인척이었다. 1696년 전라도 내 유림들과 청액소를 올려 ‘무성’이란 사액을 받았다. 더 이상 태인 고을만의 서원이 아니게 된 것이다. 추배된 이들은 상호간에 학연과 혈연으로도 밀접하게 연결된 태인의 양반들이었다. 숙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단지 지역의 명망 있는 선비를 제사하는 뜻으로 공경하면 되는 것인데, 조정에 사액을 내려 주기를 청하기에 이르렀으니, 지극히 외람되다’
  태산서원의 건립과 향현의 추배, 무성서원으로의 사액과정을 통해 그 후손들은 명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중앙 진출이 어려워진 이후 향촌에서의 주도권 경쟁은 한층 심해졌다. 서원은 권력기관으로써 그 중심에 있었다.

돈암서원 돈암서원의 전경.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진/ 이강우 기자

3. 돈암서원
  김장생

  김장생의 본관은 광산이며 서울 출신이다.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해 관직에 나갔다가 55세 때 논산으로 낙향하여 양성당을 짓고 강학을 시작했다. 김장생은 양성당에서 30여 년을 머무르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서원을 세우니 1634년 돈암서원이다. 돈암서원은 충청도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조선 후기 예학의 거점이었고, 예서의 출판과 보급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예학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로 손꼽힌다. 예를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본적인 차이라 보았으며, 예를 실천하기 위해서 개인의 수양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주희의 가례를 조선의 현실에  맞도록 쉽게 고치고 널리 보급하는 데 힘썼다. 김장생과 아들 김집은 충청도 지역 예학연구의 체계를 완성한 인물로 학문적 성과뿐만 아니라 충청도 지역에 성리학 연구를 진흥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들이 양성한 제자들은 학문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자 중에서 특히 송준길과 송시열은 중앙 정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서원의 쇠퇴
  17세기 후반에 들어와 서원은 중앙의 정치 문제에 대하여 향촌 사림의 여론을 수렴하는 일차적인 거점이 되었고, 통지문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조정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서원으로 수렴된 사림의 공론은 향촌출신 관료를 통해 중앙정치에 반영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자파지지 세력의 확대를 원하는 관료들과 중앙으로의 진출을 원하는 향촌 사림세력 사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붕당정치의 이러한 경향과 향촌 사회에서의 가문 동족의식의 강화는 결과적으로 사림 간의 공론과 명분론을 퇴색시켰다. 서원은 숙종 말기부터 영조 대에 들어가면서 그 폐단이 크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군역을 피해 서원의 노비가 된 양민, 학문이 아닌 당쟁에 골몰하는 유생, 심지어 제향을 빙자한 금품 갈취도 빈번했다. 숙종부터 철종에 이르도록 여러 차례 개혁을 시도했으나 효과가 미미했다. 결국 대원군이 섭정이 된 1864년에야 서원에 대한 모든 특권을 없애고, 서원의 누설을 엄금했으며, 대표적인 47개의 서원만을 남겨 놓고 그 나머지 서원을 모두 철폐할 수 있었다.
 

 

 

이강우 기자  rainfall92@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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