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이른 신의 죽음

노유준 수습기자, 경제학과

당신은 신을 믿는가? 기자는 종교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정 분위기 속에서, 종교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자라왔다. 교회에서 나눠주는 작은 성경책을 가지고 왔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님께 크게 혼나야 했고, 친구가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 그 친구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어머니가 젊은 시절, 사이비 교인들에게 피해를 보셨던 아픈 기억 때문이셨으리라.
  어쨌든 기자는 무신론자로 자랐다.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철학을 배우며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졌고, 니체의 철학을 접한 후로는 더더욱 신을 부정하게 됐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신이 만든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지상 세계를 온갖 부조리와 죄악의 소굴로 만든 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이 악을 막을 의지가 없다면, 신은 악의적이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없다면, 신은 무력하다. 신이 악을 막을 수도 있고 의지도 있다면, 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신이 악을 막을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다면, 신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대학에 진학한 후 처음 다닌 피아노학원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모태신앙이었던 그녀는 왜 신을 믿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대답했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한 지 100여년이 지났다. 아직도 신이 필요하단 말인가? 필요하다면 무엇 때문에 필요하단 말인가? 결론은 정말 뜻밖의 사건으로 내려졌다.
  하루는 여자친구와 심하게 다툰 날이었다. 기자의 칼 같은 논리와 자존심으로 서로 대립하고 있던 때, 여자친구는 말없이 기자의 말을 듣고는 본인은 그때 그 상황에서 어떻게 느끼고 생각했는지 이야기해줬다. ‘다른 거 다 필요 없다’고, ‘서로 한 번만 공감해주면 해결될 문제’라고 말했다. 정말로 그랬다.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더 이상 다툴 이유가 사라졌다. 그리고 정신이 아득했다. 공감이라니, 도덕시간에 지겹도록 듣던 말 아닌가.
  생각해보면 공감만큼 위대한 힘도 없다. 화해는 물론, 책을 읽을 때도, 음악을 감상할 때도 공감의 힘은 빛을 발한다. 공감의 가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공감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 힘을 실천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의 존재 의의는 공감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아직 공감하지 못하고 실천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위해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지금 대한민국은 갈등 대상에 성역이 없다. 인터넷상으로만 벌어졌던 남녀 간 갈등은 사회적 문제가 됐고, 외교, 안보, 경제 문제는 갈등의 전선을 확장시켰다.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다. 총장 직선제와 평의원회 구성을 두고 진통을 겪고 있다. 치열한 논리 싸움도 중요하지만, 결국 상호간의 이해와 공감이 갈등을 화합으로 바꾸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 이 세상에 사랑과 공감이 없다면, 지옥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세상은 각박하고 아직 신의 죽음은 이르다. 공감하자. 신이 편히 눈감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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