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졸업식이 있다. 현 시대가 그렇듯 예전의 졸업식과는 아마도 그 느낌이 서로가 다를 것이다.
 졸업의 의미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흔히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새로운 시작을 희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모두 ‘취업’이라는 한 가지 명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몇 이나 될까.
 현시기 사회 전체가 IMF라는 큰 사슬에 꿰어 국민모두에게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 학생들도 수업료 부담을 못이겨 휴학을 하거나 군대로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졸업을 맞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심각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졸업자들은 과연 졸업식장에서 가족들과 환한 웃음과 감격으로 식을 맞을 상상을 할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뜻깊은 졸업식마저 우울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졸업식의 예 말고도 지금 사회는 이 시기에 알아서 살아 남으라는 식의 위험한 발상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수 있다. 정리해고, 대량실업 등 국민모두가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고통스럽지만 우린 해낼 수 있습니다’라는 구호가 유일한 위안이자 희망으로 느껴질 만큼 우리자신이 모든것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경제적으로 모든것이 위추되어 삶의 희망마저 잃는다면 정말 슬픈 일이다. 이런 현상은 단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학생들도 이젠 자신의 계획에 대해 점차 그냥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일 뿐 대책은 없는 것이다. 모두 그냥 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길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오는 부당한 요구나 무조건적인 희생을 그저 시대상황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비유가 지나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우리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모두 공감할 것이다. 모두 어둡다. 그리고 어두운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밝고 힘찬 모습은 걱정없는 한심한 모습으로 비칠 뿐이다. 지금 서로를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좀더 희망을 가져야겠다. 어려운 시기라고 하지만 찾을 것은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기본적인 권리, 그리고 생활권 등은 말이다. 이 시기가 모두에게 피해가 아닌 좀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시련이라 생각하고 삶을 소극적 자세에서 적극적 자세로 변화 시켜야 한다. 지금 사회가 이지경이 된 것도 소극적 자세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적극적 자세로 자세로 난국을 헤쳐 나간다면 다시는 몇몇 사람에 의해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만 살면 된다는 이기적 발상을 버리고 모두가 동반자라는 인식으로 다같이 단견해야 할 때임을 각인해야 할 것이다.

최영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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