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를 만나고

  얼마 전에 영화 <동주>를 봤다. 영화 속 독립운동가 몽규는 시를 쓰는 동주를 앞에 두고, “자기 생각 펼치기에는 산문이 좋지. 시는 가급적 빼라. 인민을 나약한 감성주의자로 만드는 거이 문학이라. … 그저 세상을 바꿀 용기가 없어서 문학 속으로 숨는 것밖에 더 되니?”라고 쏘아붙이는 장면이 있다. 문인이 시를 쓰지 않는 시대에 동주는 시를 썼다. 동주는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살아있는 진실을 드러낼 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낳는 거고 그 힘이 하나하나 모여서 세상을 바꾸는 거야”라고 답한다. 그의 시는 지금까지 그 시대의 정서를 전해주고 있다. 시를 쓰고 읊는 일이 현실과 동떨어진 낭만으로 비치곤 하지만, 동주에게 시를 쓰는 일은 친구 간의 갈등과 사회에 대한 반응, 고민, 성장으로 이어졌다. 사는 일이 곧 시를 대하는 일이지 않을까.

  이 장면을 인용해서 시를 예찬하려는 건 아니고, 예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것보다는 어떤 시대에도, 시기에도 예술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가깝다.

  내가 예지를 좋아하는 이유도 같은 생각에서다. 그의 음악이 좋아서 그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다. 뮤직비디오나 디제이 믹스 영상을 보면 시각 예술에도 감각이 있다. 거기에 더해, 예지가 그의 모습대로 이 시대에 활동하고 있다는 게 좋다. 예지는 한국인 부모님 아래서 태어났지만, 뉴욕에서 자랐다. 미국에서 활동하면서도 그의 가사에 종종 한국어가 등장한다. ‘내가 마신 음료수’라는 곡에서는 모든 가사가 한국어다. 키는 작고, 서양적인 이목구비를 갖추지 않았다. 화장을 예쁘게 보다 개성 있게 하고(안 할 때도 있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끼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습에서 벗어나 있는 동시에 관습에서 한 발자국 앞서 나가 있어서 감탄스럽다. 그의 음악과 활동이 시대를 꼬집는다.

BOSHU 에디터 김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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