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와 21세기

김채윤 편집국장/고고학과

  밤 11시를 넘긴 시간, 손에 들린 팝콘. 한적한 영화관. 고민이 있을 때는 혼자 심야 영화를 보러 종종 영화관을 찾는다. 어둠 속에서 오로지 스크린에만 집중할 수 있는 2시간이 좋다. 영화를 좋아해서 문화부 기자일 때는 대구, 광주 등 전국의 특별한 영화관을 찾아다니며 영화를 봤다. 영화는 21세기에 특화된 ‘예술’이다. 누구에게든 쉽게, 누구도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누구도 알지 못했던 기법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을 동경한다.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연휴기도 했고, 고민도 많았다. 요즘 한창 이슈가 되는 영화 ‘남한산성’의 티켓을 끊었다. 영화는 생각보다 지루했고, 생각보다 냉정했다. 마블의 액션영화처럼 캐릭터들이 생생하지도 않고, 담담하고 차가운 스크린을 쳐다보다보면 가끔 지루함이 밀려올 때도 있다. 영화는 김훈의 원작소설인 ‘남한산성’이 가지고있는 건조하고 날선 문체를 그대로 표현한다. 지루하고 냉정하지만, 최근에 본 어떤 영화보다 많은 고민을 안겨준 영화다. 영화는 담담하게 병자호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극적인 효과나 드라마를 찾아보기 힘들다. 담담함 덕분에 우리는 영화 속 병자호란에서 지금의 현실을 투사할 수 있다.
  병자호란은 세계사적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지도자들의 무지가 불러온 참사였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막대한 조공을 바쳤다. 부녀자들은 청나라에 바쳐졌고, 도망을 쳐서 고향에 돌아오면 ‘환향녀’란 비난을 들어야했다. 지도자들의 ‘무지한 선택’이 낳은 결과치고는 지나치게 쓰다.

“만백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지금 세자 저하를 보내지 않으시면 저들이 더 큰 요구를 해올까 신은 그것이 두렵사옵니다”
 VS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삶을 구걸하느니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신의 뜻이옵니다. 세자 저하를 오랑캐에게 바치려 한 자들이 과연 누구의 신하이옵니까”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김상헌과 최명길이 주화파와 척화파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한다. 둘이 벌이는 말의 전쟁은 날카롭고 치열하지만 지겹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A or B로 나뉘어 논쟁하는 모습은 비단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명분을 앞세운 소모적인 정치권의 논쟁은 매일 뉴스를 채운다. 영화 '남한산성'이 이슈가 되는 것은 단순히 영화가 좋아서가 아니다. 정치권에서 영화와 닮은 현실을 냉정하게 지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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