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길이가 어중간해졌습니다. 자르기에는 너무 아깝고, 기르기에는 지금 모양새가 어정쩡한. 입 밖으로 뱉어내지도, 도로 삼키지도 못해 혀끝에서 맴돌다가 혀뿌리 밑으로 가라앉는 말들처럼. 어쩌면 제가 걸어가고 있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길이. 쉼 없이 불안정한 발걸음이 저는 끝내 그렇게 살다가 비틀거리면서 사라질 것을 예견하는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끝내 누군가를 어설프게 연민하고, 사랑하고, 증오해서 삶을 시작하고야 말았고, 그를 원동력 삼아 삶을 절뚝이며 걸어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함을 알면서도 시작하는 사랑은 얼마나 희고 긴 공백입니까. 아무것도 쓰인 적 없지만, 각자의 한숨으로 만들어낸 희고 단단한 벽. 모두가 낯선 얼굴을 견디지 못해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뒤돌아서는 어리석은 공백.

  우리는 끝내 누군가를 사랑하는 비극적인 결말에 다다릅니다. 웃는 얼굴이 예쁜 사람을, 어리석은 꿈을 꾸는 사람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애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을, 그 모든 고통을 수반하고 만나는 사람을, 그리고 모든 것을 뛰어넘는 아득한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태어난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그게 서러워서, 그 사실이 못내 서러워서 우리는 세상에 숨을 틔우자마자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는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정확한 본능이 못내 역겨워 한 해를 떠돌아다녔고, 세상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욕망만 간절해졌습니다.

  욕망으로 가득 찬 날숨을 제물 삼아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는 꺼질 줄을 몰랐습니다. 그 빛나고 화려했지만, 끝내 외로웠던 밤들이 오랜 날 지나고, 가슴속에 있던 불길이 사그라들고 하늘에 있는 별을 올려다볼 수 있게 돼서야, 저는 스스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재투성이로 변해버린 후에야 겨우. 나는 어쩌면 가벼워질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전히 삶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그 의문을 밖으로 내보내는 순간 저는 여전히 말을 지저분하게 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고는 했습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내가 했어도 그냥 입을 다물고 묵묵히 내 할 일만 하면 누군가가 예뻐해 줄 거라는 바비인형인 줄 알았죠. 내 권리는 아무도 챙겨주지 않았기에 저 스스로도 챙길 자신을 가지지 못했던 걸까요. 아니면 제가 저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기에 아무도 저를 사랑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걸까요. 저는 사랑하지 못한 순간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바닥에 얼굴을 비비고 울지 않기 위해 머리를 벽에 찧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저 자신을 온전하게 게워내야만 하는 일입니다. 내가 사랑했던 습관 태도, 오랜 시간 고수해온 가치관. 달콤한 설탕물에서 벗어나 타인의 뜨거운 화롯불을 향해 손을 집어넣어야만 하죠. 나와는 다른 정반대의 상황에 놓은 이를 이해하고, 그동안의 자기 자신과 싸워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일은 그 누구에게도 언제나 날 서고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주저했고, 많은 이들을 잃어버리고 그 무거운 그늘 아래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울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서 사랑한다는 그 붉은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사랑하는 이를 쉼 없이 죽여야만 했습니다.

잘 가요. 나의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는 사랑했던 순간을 위해 자기 자신을 벌거벗어 세상에 전시해야만 합니다. 누군가를 향해 나의 호기심을 단순한 호의로 포장해 이야기하는 건 굉장히 저열한 짓이고. 창백한 메스로 펄떡이고 신선한 삶을 가르는 것이라는 것을 가장 잘 알면서도, 누군가의 뜀박질하고 있는 생(生)에 칼을 들이밀고 헤집는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가장 잘 해내는 일입니다.
  저는 질투가 많아서 입가가 자주 틉니다. 아마 누군가를 질투하느라 입을 비쭉 내밀고는 해서 그런거 겠지요. 언제나 확신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알고는 있습니다. 제가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면서도 쉼 없이 증오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고백하기에 제 단어는 너무 서툴고 정확한 무게가 아니어서 보여주기 부끄럽습니다만은 저는 끊임없이 사람을 저울에 달아 기록하기를 즐겨 합니다. 사랑을 기록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남겠어요. 저울에서 한 발만 벗어나도 사라지는 게 기록이겠지만, 그거 하나라도 잡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겠어요.

  나는 겨울이 지나는 내내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고. 결국 자기 고백만 남은 게 내 삶이라고 체념했지만, 부디 내 삶에서 운명처럼 만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결국 사랑하고야 마는 사람에게는. 비뚤어진 길 절뚝거리면서 길을 걷다 가라앉은 내 혀뿌리 속의 사람에게는 영원한 봄만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민영. 독어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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