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야바위 놀이 마냥 아무런 근거 없이 운에 결정을 맡기지 않는 이상, 결정은 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변수와 예상결과, 또 그와 관계된 사실을 모두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사람에 따라 매우 고통스러워서 어떤 이는 그 부담을 아예 타인에게 맡겨버리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였다. 공동체의 의사결정과정이 대리인을 거치지 않았다. 개인의 생각과 의도가 직접적으로 전달됐다.
  하지만 사회가 고도화되고 시·공간적인 한계가 생기자 우리는 각 분야의 대리인에게 우리의 권력을 위양한다. 이는 2차 산업혁명에서 시작된 분업화와 맥락을 함께한다. 즉 정부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최근 사회 일각에서 나타난 일련의 사태들은 고위지도층의 큰 착각을 보여준다. 땅콩회항 사태가 그랬듯, 개돼지 발언이 그랬듯, 그들은 국민이 위양한 권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쟁취한 것 인양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는 변화한다. 4차 산업혁명이 산업혁명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가질 수 있는 큰 이유는 단순히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자율주행 자동차와 전기차를 도로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은 점차 시·공간적 한계를 없애고 있다. 시장에서도 점차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 역시 점차 어려워진다. 더 이상 그들에게 권력을 위양할 이유가 없어지기에 다시 되찾을 때가 온 것이다.
  다시 촛불이 광화문을 메웠다. '최순실 게이트'가 박근혜 대통령까지 연관되는 사태에 대한 국민의 외침이었다. 이 사태에서 우리가 느끼는 좌절의 지점은 비슷할 것이다. 정권과는 별개라 믿었던 사회의 절차와 시스템이 무너졌다. 절차와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절차와 시스템이 당연한 것인가를 묻는다면 기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독재정권에게서 피와 땀으로 쟁취했던 상식과 절차였다. 국민의 분노는 여기서 시작한다고 본다.
  결국 우리 기저의 파시즘적 사고를 버려야한다. 상식과 절차를 묻기 전 침체된 경제를 살릴 초인을 찾았던 과거를 반성해야한다.
  더 이상 초월적 지도자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시대는 끝났다. 그래서도 안 된다. 박근혜 정부는 경제 논리를 쫓았던 사회가 낳은 괴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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