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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리둥절, 이라는 어근은 사실 의성어에서 온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상황에서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어리둥절이라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산기슭에서 메아리가 울려 퍼지듯이, 어리둥절.
 
  언젠가는 활화산이 맺힌 한을 토해내듯 분노했던 것 같은 기억도 있지만, 지금 와서는 글쎄 오히려 숙연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산산 조각난 PPT의 폰트들과 한 음 한 음 분해되듯 떨리는 새내기 발표자의 목소리를 지켜보는 나의 마음은 높고 고독한 산꼭대기에 위치한 어느 절에서 수련하는 수도승의 머릿속과 같이 고요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고양이 씨의 한숨 소리와 마지막 인사, PPT 씨의 어둡고 조용한 표정이 모두 스쳐 지나가고 놀라운 길치 막내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조원에게 머릿속으로 물었다. 우리 열심히 했는데, 왜 이렇게 됐지? 하지만 텔레파시 같은 초능력 따위 없는 평범한 나의 질문이 그에게 닿았을 리는 없었다. 강의실을 걸어 나오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아무리 머리가 맑아져도 알 수 없는 것은 모든 것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다.   

  비록 가위바위보에 져서 얼떨결에 조장이 되었지만, 분명 그들의 첫인상은 좋았다고 기억한다. 넉살 좋았던 새내기는 누구보다 빠르게 자신이 발표를 맡겠다고 나섰고, PPT나 자료조사도 모두 합리적으로 역할을 맡아주었다.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그 어떤 조별과제라도 할 수 있어! 만큼 희망적인 감상은 아니었을지라도 나쁜 일이라곤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모두 함께 카페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다. 귀여운 고양이들도 있었고, 에어컨도 시원했고, 열심히 한 자료조사도 모두 모여서 이대로라면 아주 여유롭게 조별과제를 마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고양이들이 달려드는 광경과 노트북이 부서지는 소리에도 나는 좌절하면서도 설마,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아무런 잘못도 한 것이 없었고 그렇다면 모든 일은 잘 되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자료조사를 할 때도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고양이 씨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자료들을 다시 모으려 고군분투 중이었는데, 나도 내가 백업해두었던 자료 부분을 다시 정리해서 최종 파일을 보냈다. 최종 파일을 메일로 보내는 버튼을 누르고 나서 얼마나 마음이 상쾌해졌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다 만들어지고 나서 발표까지 끝나면, 이 일도 이제 끝이구나. 그러고 보면 제법 나쁘지 않은 교양이었어. 그렇게 피곤한 눈을 비비고서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 그 카톡이 온 것이다.
  PDF파일이라 Ctrl c + Ctrl v를 할 수 없네요. ㅠㅠ 한글 파일로 보내주세요ㅠㅠㅠ
  PDF? 다시 확인해보니 그랬다. 내가 왜 그랬지? 피곤에 휩싸여 손가락이 잘못 움직이기라도 한 건지. 나는 이전의 멀쩡한 파일을 찾으려고 마우스 휠을 움직였다. 그런데 그 이전 파일을 PDF로 덮어써버린 것 같았다. 그러니, 모아놓은 자료들이 PDF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우리는 서로 PDF 파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논하다가 결국 전체 자료 정리가 늦어져 버렸다. 

  오늘로 그 이상한 일들도 끝이 나고 만다고 생각했지만, 발표자가 아직 오지 않았던 순간부터 무언가 알아차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PPT 씨는 미리 발표 자료를 옮겨 놓으려 했는데 순식간에 끝나야 할 일이 영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가 가져온 USB는 컴퓨터와 연결되자마자 갑자기 텅텅 비어버렸고, 미리 보내놓은 메일조차 갑자기 막혀버린 인터넷 때문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른 교양관 복도를 내달려 관리실을 갔으나, 하필, 지금 이 순간에, 한 시간 정도 인터넷을 막아놓았다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내게는 희망이 남아있었다. 그 절망적인 대답을 들은 PPT 씨의 안경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신감으로 빛났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해결해보겠다는 그의 대답이 조별과제, 제가 살려보겠습니다. 라는 굳센 대답처럼 들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계를 보았고, 아직까지 오지 않은 발표자의 빈자리를 보았다. 고양이 씨도 불안한 눈빛으로 시계를 끊임없이 보고 있었다. 조별과제 단톡방에 남겨놓은 언제 도착하느냐는 질문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5분이 남았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보며 발표를 맡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서 그에게서 돌아올 대답을 생각했다. 비 때문에 늦었어요, 금방 도착해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발표 준비만큼은 완벽하니까. 우리의 조별과제는 절대로 망하지 않아요! 머릿속에서 새내기가 생기발랄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전화기 너머로 비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늘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어디야. 5분 남았는데 왜 안 와!”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그 대답을 원하며 물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의 사실을 고했다.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아마 활화산이 폭발한 것은 이쯤이었을 것이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마구 솟아오르는 용암이 차라리 창밖의 빗줄기에 식기를 바라며 나는 나섰다. 그가 일러주는 주변 풍경은 어디에나 있는 나무, 맨홀 뚜껑, 자동차 같은 것이어서 결국 비로도 그 용암은 식지 못했다.
  우리가 도착한 것은 수업시간이 시작된 지 5분이 지나서였고, 나는 그를 던지듯 발표 단상으로 보냈다. 고양이 씨의 재촉으로 그가 덜덜 떨며 발표를 시작하려는 찰나, 자유를 찾아 PPT를 박차고 나갈 것 같은 폰트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새내기의 불안한 눈빛과 함께 어리둥절, 그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건 인간의 능력 밖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초능력 같은 것. 나는 머릿속으로 지금 당장 필요한 초능력 같은 것을 골라보았다. 우리 조의 발표를 지켜봤던 모든 이들의 기억을 지워 버릴 마인드 컨트롤, 학교를 때려 부술 염력, 조별 과제를 처음 시작할 때로 돌아갈, 아니 아니 수강신청을 한 순간으로 날 데려가 줄 타임리프.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조별과제는 평범하지 못하게 끝이 나버렸고, 그런 결말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내 조별과제는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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