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조별과제가 이렇게 끝날리 없어!

< 4 >
  조장 누나가 귀여운 캐릭터 우산을 쓴 채 헐레벌떡 뛰어와 빗속에 갇혀 있던 나를 구해줬다. 나는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누나가 내 손목을 잡고 뛰기 시작하는 바람에 나는 ‘죄으소옹흐…….’ 라는 이상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얼른 뛰어야 할 것 같아”
  분명 정중한 말이지만 내 귀에는 ‘뛰기나 해’라는 말로 들렸다. 내 머릿속에서 조장누나는 첫날부터 ‘저……. 역할을 정해야 할 것 같은데요……’ 라고 말하는 수줍은 사람이고 조별과제를 진행하면서 한 번도 큰소리 낸 적 없는 다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노트북이 부서졌을 때 누나의 인내심도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자료 정리가 늦어졌을 때나 피피티가 발표 전날에야 만들어졌을 때도 파삭 파삭 부서지고, 결국엔 내가 버스를 잘못 타고 길을 잃어 장대비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파사삭 하고 박살이 나서 푸스스 흩어졌을지도 모른다고.
  나와 누나는 찰박찰박 빗물을 튀기며 뛰었다.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1분 남았다.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서 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빨간 점은 뽈뽈뽈뽈 움직였다. 짜증나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머릿속 지도를 지워버렸다. 이런 이상한 능력 따위 정말 쓸모가 없다.
  교양관에 헉헉 숨을 내쉬며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업시간을 5분이나 넘겨버린 상황이었다. 내가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나는 강의실 문을 열기 전 떨리는 마음에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데, 크엑컥, 문이 벌컥 열렸다. 숨이 꼬이는 바람에 켁켁 거리는데 문을 연 조장 누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으으, 민망해. 그런 생각도 잠시, 눈을 들어 앞을 보는데 쏟아지는 시선에 온몸이 따가워졌다. 특히 교수님의 눈빛이 너무 강렬했다.
  도, 도망치고 싶다.
  교수님의 검은 눈빛, 신입생은 도망칠 수 없다. 아니, 드립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죄송합니다, 하고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야옹 누나가 발표자가 늦는다고 얘기했는데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며 얼른 올라가서 발표를 하라고 귀띔했다. 그제서야 나는 스크린에 떠 있는 피피티를 발견했다. 근데 어제 밤에 봤던 피피티하고는 뭔가 다른 것 같은데? 나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며 피피티를 맡았던 형을 바라보았다. 형의 음침한 낯빛은 더욱 어둡다 못해 거의 잿빛이었다. 뭐, 뭐지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마지막으로 조장누나가 내 손에 프레젠터를 쥐어주었다.
  나는 떠밀리다시피 연단에 섰다. 가슴이 떨려서 그런지 손발도 달달달 떨려왔다. 이 수업을 추천해준 선배. 발표자가 제일 쉬운 파트라고 조언했던 그 선배. 만나기만 하면 멱살을 잡을 거라고 다짐했다. 아니, 신입생 속여먹으면 재밌냐? 재밌냐고! 그런 분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발표를 해야 하니까. 다행히도 강의실 사람들을 둘러보니 비를 쫄딱 맞아 발발 떨고 있는 내 모습이 동정심을 유발한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발표문을 꺼내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
  순간 욕이 나올 뻔 한 입을 한 줌 남아있는 정신력을 동원해서 간신히 막았다. 악몽인가, 악몽인 건가. 시험공부 하나도 안했는데 시험지를 받고 눈앞이 깜깜해지는 꿈 혹은 까마득한 다이빙대에 세워져 등 떠밀려 떨어지는 그런 꿈. 그래 꿈일 거다. 발표문이 몽땅 젖어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 꿈일 거야. 깨어나자. 깨어나면 발표문을 적다가 잠깐 졸았던 거야. 아후, 소름 끼치는 꿈이었어, 라고 생각하며 발표문을 마저 쓰겠지. 집을 나올 때 우산을 챙기고 버스도 제대로 타고. 급한 마음에 무작정 타면 안 되고 끝까지 몇 번 버스인지 확인해야 돼. 그리고 강의실에 잘 도착해서 조원들과 마지막 점검을 하고 발표를 하는…….
  핫, 현실 도피는 씨알도 안 먹히는 건가. 이런 씨알……! 여전히 나는 사람들 앞에 서있고 발표문은 번져서 읽을 수 없었다. 정신은 혼미해지고……. 어찌어찌 인사를 하고 머릿속에 남아있는 발표문의 흔적을 떠올리며 발표를 하려고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나는 벙찌고 말았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친 것일까. 분명 어제까지는 멀쩡하다 못해 급하게 만들었음에도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피피티였는데, 글씨들이 고딕체로 잔뜩 깨어져있었다. 그에 글자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삐죽삐죽 서로의 칸을 침범하고 화면을 이탈하고…….
  뭐야, 이거. 내 20년치 불행이 지금에서야 쏟아지는 건가. 눈물이 찔끔 나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거 너무 서럽잖아. 피피티는 어제 자정에서야 만들어졌지. 새벽까지 밤새서 발표문 만들었지. 버스 잘못타서 길 잃고 비까지 쫄딱 맞고. 심지어 발표문은 다 젖어서 읽을 수 없지. 게다가 피피티도 다 깨졌다니. 이건, 진짜 불행의 여신이 들러붙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어, 피피티가 다 깨져버렸네요. 죄, 죄송합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어쩌고 저쩌고 횡설수설 변명 같은 말을 하고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발표를 했다. 했던 것 같다.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말을 하고 움직이고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어, 앉았던 것 같다. 그 뒤로 교수님이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늘 있었던 불행을 곱씹으며 자리에 앉아있었을 뿐.
  사람들이 일어나고 강의실을 나가는 소리가 왁자지껄 들릴 때야 나는 수업이 끝났음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왜 늦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원들에게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수업이 끝났는데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조원들을 보면서 입을 한 마디도 뗄 수 없었다. 우르르 학생들이 나간 후 적막만 맴돌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야옹 누나의 한숨이었다. 이어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라는 말과 함께 야옹 누나는 강의실을 떠났다. 피피티 형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옆자리의 조장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누나는 희미한, 마치 깨질 것 같은 미소만 남기고 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갔다.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 나 혼자 남았다. 으어으아아. 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책상에 엎드렸다.

  아무래도 이 조별과제, 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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