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3일부터 16일까지 3박 4일간 8백 15명의 남한 대학생들이 금강산을 찾았다. 통일부 산하 사단법인 ‘지금 우리가 다음 우리를’(이하 지우다우)에서 ‘8.15기념 금강산 대학생 대축전’이라는 이름으로 금강산 캠프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대규모의 대학생들이 DMZ(군사 분계선)을 넘어 육로로 금강산을 찾았기에 그 의의를 더한다.

<편집자주>


DMZ를 넘어 온정각까지

  지난 8월 13일 새벽 5시. 전날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던 연세대에는 우리를 싣고 북측 땅을 누빌 20대의 관광버스가 도착했다. 20개조로 나눠진 우리는 남측 출입국 관리실(CIQ)이 있는 강원도 고성으로 향했다. 출발하기 전의 흐릿한 날씨에 비라도 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통일전망대가 가까워질수록 하늘은 더없이 청명하게 바뀌고 있었다.

  출발 한지 4시간만에 남한 CIQ에 도착해 통관절차를 밟았다. 각자의 짐을 검사하고 북측에서 우리의 신분을 증명해줄 몇 가지 서류가 담긴 목걸이를 받은 후 기자회견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북한으로 떠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차에 올랐다. 차가 천천히 비무장지대를 지날 때 창 밖으로 보이는 ‘지뢰조심’이라는 푯말이 조금은 삼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푸르디푸른 숲과 다람쥐의 한가로운 모습이 너무도 한적하게만 느껴졌다. 과연 이곳이 우리의 가슴에 반세기동안 금을 그어 놓았던 그곳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곳곳에서 잘 다녀오라고 손짓해주는 헌병들을 보며 내가 가는 이 길이 얼마나 의미 있는 길인지 새삼 느끼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우리 앞에 철조망이 걷혀있었다. 그렇게 걷어내고자 했던 철망이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차가 잠시 서더니 인민군이 올라타 날카로운 시선으로 우리를 응시했다. 처음 보는 인민군의 모습에 순간 움찔했지만 곧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DMZ를 통과하고 나니 북한 마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회색 빛 슬레이트의 비슷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북한 주민들은 옥수수 밭이나 논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둑에는 황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고, 아이들은 개울가에서 고기잡이에 한창인 모습은 더없이 정겹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드디어 고성항 북한 CIQ에 도착했다. 연세대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해 도착하기까지 꼬박 10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모두들 피곤한 기색하나 없이 통관검사를 다시 한번 더 받고 걷기 시작했다. 고성항에서 온정각까지 약 8.15km의 길을 저마다 한반도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8백여명의 학생들이 길게 줄지어 걸었다. 비록 우리가 걷는 길은 철조망으로 쌓여있어 북한 주민들과 함께 걷지는 못했지만 똑같은 방향으로 걸으며 서로 손 흔드느라 정신이 없었다.‘이렇게 만나면 반가운 것을 왜 그렇게 만나기가 쉽지 않은지 모두들 안타까운 맘에 보이는 주민들마다 힘껏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더욱 안타까웠는지도 모른다. 눈앞에 보이지만 이야기해 볼 수도 가까이 가볼 수도 없는 안타까운 심정이 가슴 한 구석을 더욱 아리게 했다.


천하제일명산 금강산을 오르다

  고단했던 첫날을 보내고 둘째 날과 셋째 날 구룡연과 만물상 통일등반을 했다. 구룡폭포는 비봉폭포, 옥영폭포, 십이폭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폭포라고 한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그 절경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참을 걷다보니 바위에 “이 문을 지나야 금강산 맛이 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큰 바위 틈으로 지나 갈 수 있게끔 길이 나있었는데 그 곳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금강문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산을 오르며 곳곳에서 만난 안내원들은 묻는 말에 응답도 잘 해주고 궁금한 점은 물어오기도 했다. 산에서 처음 만난 안내원 정명숙씨에게 통일이 되면 남한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을 물으니 “통일 되야 편안하게 가지 지금은 어렵지 않습니까. 통일만 된다면 다 가보고 싶지요”라고 말하며 통일이 오길 바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남측 청년 학생들이 통일운동을 많이 합네까”라고 물어보기도 하고 대구 U대회 북한 참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다른 안내원은 생각보다 남한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아 보였다. 충남대에서 왔다고 하니 “충남대면 한총련 1기 의장이 나온 학교 아닙네까”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안내원과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금강문에서 구룡대에 오르는 길에는 2개의 연못이 아래위로 연결돼 잇달아 놓인 구슬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연주담이 있었는데 그 고여있는 물의 빛깔이 다른 곳과는 달리 푸르름을 더했다. 흐르는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깨끗한지 한 모금의 물로 더위를 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연주담을 뒤로하고 비봉폭포와 무봉폭포를 지나 굽이굽이 외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비로소 장엄한 구룡폭포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길게 뻗은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땀이 식는 듯 했다.

  다음날 오른 만물상은 특정한 봉우리 이름이 아니고 온정령 북쪽 금강산의 오봉산일대의 기암군을 한꺼번에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가 올랐던 곳은 천선대와 망양대였다. 가파른 계단으로 이루어진 외길을 따라 산을 오르자니 숨이 턱턱 막혔다. 가뭄으로 인해 계곡에 물이 흐르지 않아 더욱 힘들었다. 천선대와 망양대는 실제 거리는 많이 차이 나지 않지만 가파른 길과 기암절벽 때문에 시간이 꾀 오래 걸렸다. 정상에 오르니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라지는 안개와 구름 때문에 금강산이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평양 모란봉 교외단

만물상 산행에서 돌아온 우리는 곧장 평양 모란봉 교외단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평양 교외단과 쌍두마차를 이루는 모란봉 교외단은 그 명성처럼 화려한 공연들을 펼쳤다. 지상에 있는 시간보다 공중에 떠 있는 시간이 더 많아 보였다. 통일을 주제로 한 공연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는 하나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인간의 몸이 이렇게까지 유연할 수 있다는 것에 다시금 놀랐다. 공연 중 한 단원이 착지를 잘못해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그래도 아픈 다리를 절며 공연을 계속하는 그 단원에게 우리는 힘찬 박수와 환호를 보내 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음에 더욱 안타까웠다. 공연이 막바지로 치 닫고 하나라는 노래를 합창하면서 우리는 눈시울을 적셨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라고만 외칠 뿐이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있는 이 공간이 하나됨의 장소임에는 틀림  없었다. 막이 내려지고 단원들은 눈앞에 없었지만 우리는 긴 여운을 가슴속에 담아 다음을 기약하며 오랜 시간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마지막날 3박 4일의 여정을 마치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금강산을 가기 전 통일을 생각하며 떠난 사람도 있었고 단순히 관광으로만 생각하고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기 싫어 눈물을 흘리는 서로의 모습에서 통일의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우리는 뜨거운 통일의 기운을 가슴 가득 담고 돌아온 것이다.  나는 처음 금강산으로 향할 때‘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을 것이다’라는 생각만 했었다. 그러나 짧게나마 북한 사람들을 접해보면서 느낀 것은 동질감 보다는 이질감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이질감을 이해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서로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서울로 향했다. 



사진 이진경 기자 ljg416@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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