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우산국과 사자

 

   우산국 정벌에 실패한 이사부가 나무로 만든 사자를 보이며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것을 풀어서 모두 밟아죽이게 하겠다’라고 협박했다 그랬더니 우산국 병사들은 그것을 무서워하며 항복했다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사료가 전하는 내용인데, 그것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고, 귀중한 사료가 우화되는 것 같아 아쉽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512년의 신라와 우산국에는 사자가 없어, 사자를 본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대 목우사자로 협박하고 그것이 무서워서 항복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하다.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몽둥이나 예리한 창검보다 총기류를 더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의 살상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무 조각에 불과한 사자상을 보고 병사들이 항복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우산국은 신라의 침범을 격퇴한 경험이 있어, 신라의 침범이 반복될 때마다 적개심만이 아니라 신라 정도는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커졌을 것이고, 신라에 복속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는 국가의식도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보지도 못한 목우사자가 무서워 항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사자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전개되었다면 우산국 병사들은 오히려 냉소하며 더 분기충천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무로 만든 사자상이 두려워서 항복했다면, 그들이 사자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원래 사자란 삼국은 물론 중국에도 없는 맹수였다. 그래서 4세기에 처음으로 사자를 본 중국인들은, 곤륜산에서 기를 먹고 이슬을 마시는 상상의 동물로 여겼다. 얼마나 사나운지, 사자가 한 번 울면 백수의 왕이라는 호랑이도 벌벌 떤다고 인식했다.
   그런 사자가 날개를 달고 천공을 비상하며 인간의 영혼을 안내하는 성수로 믿게 되는 것은 불교의 교리를 인식한 이후의 일이다. 그 사자는 문수보살을 보좌하며 중생의 연혼을 이상의 세계로 인도하고, 불교의 교리에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재앙을 내린다는 성수였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사찰 입구에 사자상을 세워서 불교를 수호하려 했고,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은 갑옷이나 무기에 사자를 세기는 방법으로 필승을 보장받으려 했으며, 후손들은 묘역에 사자상을 설치하여 잡귀로부터 조상의 영혼을 보호하려 했다.
   따라서 우산국 병사들이 목우사자를 두려워했다면, 그것은 외형이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종교적 주력이었다. 우산국 병사들은 신라가 보이는 목우사자를 보며, 신라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그것이 발휘하는 주력에 의한 재앙이 휩싸일 것이 두려워서 항복한 것이다. 그러나 512년의 신라는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우산국이 불교를 인식했다고 볼 수 있는 기록도 없다. 고구려가 374년에 불교를 공인했고, 백제는 12년 늦게 인정했으나 신라는 528년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신라만이 아니라 우산국에도 국가의 공인과는 별도로 불교를 신봉하거나 인식한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신라에는 낙랑이나 백제, 고구려 등을 통하여 불교를 인지하는 사람이 많았고, 불교를 전파하려는 외부 세력의 활동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사자에 대한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에, 이사부는 그런 인식에 근거해서 사자를 활용하는 계책을 건의하여 지증왕의 허가를 받은 것이다. 그것은 우산국도 마찬가지다. 사자의 종교적 주력, 사자가 불교를 수호하는 성수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 용맹한 병사들이 두려워하며 항복한 것이다.
   문제는 우산국이 사자의 그런 의미를 어떻게 인식했는가인데, 그런 의문은 우산국이 불교를 인정하는 백제나 고구려, 혹은 중국이나 인도 등과 교류했을 가능성을 같이 제시한다. 우산국이 불교를 인정하는 국가와 교류하고 있었거나, 불교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우산국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목우사자는 신라의 정벌도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산국이 불교를 이해하는 문화국가였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성수로도 보아야 한다.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다음 연재는 6. 신라의 천하사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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