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애의 『지하촌(地下村)』을 중심으로

츨처. ian symmonds & associates 블로그

   서울 강남에 10억 원이 넘는 아파트를 소유한 40대 가장이 아내와 두 딸을 살해했다.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수치상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경제적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는 것을 보며 박탈감을 느끼는 ‘상대적 빈곤’이 한국 사회에 균열을 일으킬 위험요소임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임신한 아내의 생일 케익을 살 여유가 없어서 크림빵을 사다 뺑소니차에 치여 죽는 현실과는 대조적이다.
   유엔개발계획은 ‘2014년도 인간개발보고서’를 통해 많은 국가가 국민들을 빈곤에서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지만 여전히 절대다수가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고 지적한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스 피케티(Thomas Piketty)가 저서 『21세기 자본』(2014)에서 주장하듯 부의 불평등이 1차 세계대전 이전 수준으로 심화되고 있는 것인가?
   1936년 <조선일보>에 발표된 강경애(姜敬愛, 1906~1944)의 단편소설 『지하촌(地下村)』은 궁핍한 서민의 끝없이 지속될 것 같은 불평등을 일제강점기의 빈민촌을 배경으로 그려낸 작품으로서, 고통스럽게도 아름다운 모방된 진실을 묘사하고 있다. 소설 속의 칠성이, 칠성이 어머니, 동생들, 큰년이 등은 선대는 자신의 생존을 해결하지 못하고 후대는 선대의 궁핍을 그대로 이어 받는 악순환만이 전개되는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 칠성이는 병마에 시달리는 어머니와 두 동생을 먹여 살려야 하는 한 가정의 가장이지만 불구자에다 거지이다. 칠성이가 연모하는 앞집 큰년이 역시 눈이 보이지 않는 불구자로 극심한 궁핍에서 해방될 능력을 상실한 인물이다. 큰년이에게 선물할 옷감을 뜨고 동냥에서 돌아오는 도중 비를 만난 칠성이는 거지 사내와 조우하는 연잣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오게 되는데, 그 사이에 큰년이는 읍내의 부잣집으로 팔려 가버린다. 
   아기는 언제 그 헝겊을 찢었는지 반쯤 헝겊이 찢어졌고 그리로부터 쌀알 같은 구더기가 설렁설렁 내달아오고있다. “아이구머니. 이게 웬일이야 응, 이게 웬일이어!” 어머니는 와락 기어가서 헝겊을 잡아 걷으니 쥐가죽이 딸려 일어나고 피를 문 구더기가 아글바글 떨어진다. “아가 아가 눈 떠, 눈 떠라, 아가!”
   머리에 난 종기를 치료하지 못해 쥐가죽을 붙인 아기가 죽게 되는 상황은 잔혹함을 넘어서는 섬뜩함이다. 평론가 김윤식은 “소설이 과연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러도 좋은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벼랑에까지 몰고 간”이라는 말로 강경애의 극단적 사실주의를 평하는데, 이렇게 드러난 한 가정의 환멸과 절망의 현실은 당대의 궁핍 양상을 보다 적나라하게 가시화한다.
   러시아 태생의 언어학자인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에 의하면 인간의 정상적인 언어 활동에서 은유와 환유의 양태가 대립적으로 나타나고 이는 곧 언어예술인 문학의 한 특성으로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은유는 두 개의 사물 사이의 유사성을 찾아, 환유는 전체와 부분의 끊임없는 연상(인접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언술활동이다. 이 은유와 환유의 과정은 상호 작용으로 나타나며, 문학에서 나타나있는 선택과 결합, 즉 은유와 환유는 작가의 사유 방식에 대한 해석의 도구로서 작용할 수 있다. 
   ‘지하촌(地下村)’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은유적 성격을 띠고 있다. 지상적인 사회 곧 인간이 인간답게 생을 영위하는 지대가 지상촌이라 한다면 지하촌은 1930년대 식민지 한국 사회의 공간적 은유이자, 불모지, 황폐한 땅, 암담한 현실의 은유적 일컬음이라 할 수 있다. “파리가 우글우글 끓는”, “구더기가 아글바글 떨어지는” 피폐하고 현실적인 칠성의 공간은 ‘지하촌’과 환유적으로 관계돼 있으며, 암울하고 모순적이며 퇴행적인 30년대 공간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기표의 차이를 통해 기의를 가능케 하면서 그 기의가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과정, 즉 은유와 환유 구조를 형성하는 과정을 기호학자 그레마스(Algirdas-Julien Greimas)의 ‘행위소 모델’을 통해 좀더 구체화해 보기로 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이야기에는 행위소(actant)라고 하는 이야기 안에서의 역할과 관계에 따라 규정되는 전형적인 인물(장소나 사건, 상황도 가능)이 있다. 그레마스는 이 행위소들을 주체-객체, 발신자(주는 자)-수신자(받는 자), 조력자(보조자)-적대자라는 세 쌍의 대립항으로 도식화한다. 이를 바탕으로 작품의 표층구조 아래에 있는 심층구조와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예들 들어, 마르크스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도우려는 욕망에 의해 다음과 같이 분배될 수 있다. 이 도식에서 ‘인간’은 계급 없는 사회를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은 조력자가 되며, ‘부르주아 사회’는 이에 대한 반대자가 된다. 이러한 운동은 ‘역사’의 소명에 따른 것이며, 그 혜택은 궁극적으로 ‘인류’를 향한다.
   이러한 구조에 「지하촌」을 비추어볼 때, 주체인물인 칠성이는 적대세력의 방해에 의하여 객체를 획득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보조자를 만나지 못한다.
   따라서, 연잣간에서 주체인 화자에게 사회 현실의 모순과 삶의 불평등을 깨닫게 하고 민중 지향적인 사회를 각성케 하는 거지 사내의 출현 또한 조력자 없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결국 칠성이의 자각이 미래의 실천으로 연결될지에 대해서 불확실함을 남긴다. 즉, 구더기로 뒤범벅이 되어 죽어 가는 동생의 모습을 직면한 후 제시되는 작품의 마지막 문장 “칠성이는 묵묵히 저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는 자신의 운명을 쥐고 있는 듯한 하늘에 대해 원망감 또는 증오를 드러내면서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칠성이의 소극적 삶의 형태를 표면적으로 짐작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작품의 열린 결말로서의 마지막 장면은 읽히는 텍스트(readerly text)가 아닌 씌어지는 텍스트(writerly text)가 되어 독자가 독서 과정의 역동적 성격에 기여하며 텍스트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데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요컨대 인물의 적극적인 변화를 의미하진 않지만 칠성이의 상황에서 보일 수 있는 저항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하늘을 노려보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은 독자에게 어떤 행동을 제시하는 것보다도 강력한 의미 해석을 가져올 수 있는 대목이 되는 것이다.
   작가적 화자 소설에서는 시각적인 사건의 보임이 중단된 후에도 화자의 목소리가 울려오는데, 바로 이러한 자기반사적 울림의 목소리에 의해 작가적 화자의 자의식이 표현된다.
   마틴 펠드슈타인 하버드대 교수는 피케티가 주장한 부의 세습으로 인한 ‘끝없이 지속되는 불평등’은 사람이 죽지 않고 평생 살 때에나 가능한 일이라며 『21세기 자본』의 일부 내용이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실업자 상태를 벗어날 수 없거나 설령 취업을 한다 해도 저임금의 불안정한 비정규직에 불과한 경우가 많은 이들에겐 지금의 현실이 ‘지하촌’에 다름 아닐 것이다. ‘객관적’으로 가난하든 ‘주관적’으로 가난하든 빈곤은 영혼을 잠식한다.
 

최영 대학원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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