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빛나고 있는 과거, 사진의 본질을 들여다보다

1.군복입은 흑인이 경례하는 사진이 담긴 프랑스 주간지 <파리마치(Paris Match)>
2.다카키 마사오가 찍힌 만주일보 3.윌리엄 클라인의 1955년도 사진

   아프리카 대륙 북서부에 위치한 알제리에서 독립전쟁(1954~1962)이 벌어지던 당시, 한 이발소에서 프랑스 현대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주간지였던 <파리마치(Paris Match)>를 집어 든다. 그 표지는 군복을 입은 한 흑인이 프랑스 국기를 올려다 보며 경례를 하는 사진을 담고 있었다. 외연적 의미는 단순하다. 여기에 프랑스 국기에 경례하는 흑인 병사가 있다는 것.
   그러나 단순한 진술을 넘어서면, 이 기표는 흑인들이 그들의 조국 프랑스에 충성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프랑스 제국주의는 정당한 것이라는 내포적 의미를 생산한다. 즉 그 겉표지는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려는 <파리마치>의 의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 장교 임명 직전에 조선인 ‘다카키 마사오’가 졸업식에서 생도 대표로 경례하는 모습이 찍힌 만주일보의 사진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우리가 사진을 읽는다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스투디움(studium)’으로 그 시각적 정보를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것을 말한다. 스투디움은 존재론적으로 보는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보는 순간 응시자가 아는 영역에서 읽혀지고 문화적 코드로 누구나 공감하는 함축적인 의미를 말한다.
또한 우리가 일상에서 거의 반사적으로 어떤 현상이나 상황을 즉각적으로 해석하는 것 역시 일상의 친숙하고 익숙한 개념 다시 말해 문화적으로 길들여진 앎의 스투디움 때문이다. 따라서 내포된 의미는 단순히 그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들에 의해서 생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화적 레파토리 속에서 활성화된다.
   가령 시골 초가집과 토담이 보이는 배경에 엉뚱하게도 현대식 주유소의 원색적인 건물을 병치시킨 사진, 아스팔트 도로 틈 사이로 돋아난 이름 모를 잡초 사진, 어느 시골 간이역에 짐 보따리와 지팡이를 쥐고 쪼그려 앉아 있는 할머니 사진, 등은 누구나 공감하는 함축된 의미-신구 문명의 교차, 생명력, 소외된 계층, 정치적 사건 등-로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문화적 코드로 읽어낸 스투디움의 일방적인 해석 작용이다.
   이와는 반대로 문화적 영역 밖에서 구체적 의미나 명칭을 가질 수 없는 그러나 응시자의 아주 특이하고 강렬한 감성적인 관심을 푼크툼(punctum)이라고 한다. 푼크툼은 한 마디로 떠도는 섬광, 파괴자, 상처, 동요이다. 그것은 화살처럼 장면을 떠나 ‘나를 찌르는’ 찌름이다. 정확히 말하면 주제를 “찌르는 것(point)”, 곧 주제로부터 우리를 감동시키고 동요시키고 전복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로버트 프랭크와 더불어 현대사진의 길을 개척한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 1928~)의 1955년도 사진에서 우리 대부분은 1950년대 미국의 총기허용 문화와 동시에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을 전달받을 수 있다. 사진전의 도슨트가 이러저러한 사진이다라고 소개할 때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바로 그것이 스투디움이 된다. 그러나 푼크툼은 이중으로 된 뫼비우스 띠와 같이 언제나 문화적인 측면의 스투디움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그래서 바르트는 비유적으로 푼크툼은 스투디움을 파괴하고, 장면을 떠나 화살처럼 관객을 관통하는 것이라고 했다.
   앞서의 같은 사진에서 우리 중의 하나는 총이 아닌 남자아이의 빠진 이에 시선이 멈출 수 있다. 이가 빠져 있는 아이를 보면서 응시자는 폐부를 찌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환유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남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미국의 총기 문제나 아이들의 해맑음이 아닌, 어린 시절 시장에 열무 몇 단을 팔러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다 지쳐,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가다 돌부리에 넘어져 생긴 그때의 상처와 봉인된 기억이 쏟아져 나오면서 사진을 뚫어지게 보게 하는 그것이 푼크툼인 것이다.
   푼크툼은 또한 닮음(icon)을 확인하거나 상징(symbol)적인 의미를 얻을 수 있는 사진 이미지가 아닌, ‘코드 없는 메시지’로서의 지표(index)에 속하는 것으로 그 어떤 해독에 앞서 존재했던 어떤 것의 흔적을 말한다. 이미 사라진 것이나 차마 사라지게 할 수 없는, 어떤 코드화된 시스템이나 의미화에도 포획되지 않는 독자적 절대성을 지닌 사랑의 대상을 되살려내고 싶은 미칠 듯한 욕망으로 사진을 응시할 때 만나는 건 ‘지금 없음’이 아니라, ‘그때 거기에 있었음(That has been so)’이다. 오래 전의 사진 한 장에서 바르트가 발견한 것은 과거에 속하지만 실제인 이미지, ‘지금도 빛나고 있는 과거’이다. 비록 그 대상은 휩쓸려 갔지만, 그 흔적은 여기에 남아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의 지시 대상은 필연적으로 현실적인 것이고, 실제 존재했던 것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존재했던 것의 증명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사진에 응시자를 찌르는 미세한 세부, 작은 이미지가 있을 때 사진은 참으로 아름답다. 바르트식으로 사진을 읽게 되면 세상에는 나쁜 사진이란 게 없고, 잘못 찍은 사진도, 실패한 사진도 없다. 사진의 찍힌 이미지 모두가 우리 삶의 흔적이기에 하나같이 소중한 것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바르트가 회화와 언어에 대립시켰던 사진의 고유한 특성인 지표성(indexicality)을 무너뜨렸다. 장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사진은 사라짐의 순간을 보존하나, 합성 이미지에서 실재는 이미 사라져 있다.”
   디지털 사진은 더 이상 피사체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진적 생생함을 가지고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제시한다. 디지털 사진은 더 이상 ‘그때 거기에 있었던 것’의 흔적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디지털 혁명은 이미 기술적으로 이미지 생성과정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함께 진행 중이다. 이제 더 이상 일회성의 유일무이함에서 느끼던 가까이 있지만 먼 곳의 기운도 만질 수 없고, 나를 아프게 찔러대는 사진의 신비로운 힘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디지털 무한 복제기술과 완벽한 조합·합성의 이유만으로 오늘날 모든 디지털 이미지를 단숨에 ‘아우라’ 상실과 이로 인한 예술작품의 죽음으로 섣불리 진단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결국 디지털 이미지 또한 어떤 목적을 위해 활용되는 재현도구일 뿐, 중요한 것은 기술이 극단으로 밀어붙인 대상 없는 재현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응시자의 스투디움, 혹은 그만의 푼크툼을 자극하는 상황적인 신빙성이 아닐까.


최영 대학원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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