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부터 인상파 그리고 근대사회까지

 

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
 비너스의 탄생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48년 이후 이 시대의 유럽을 지배하는 용어는 ‘진보’였으며,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양대 계급으로 재편돠양상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새로운 문화적 활력을 지닌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시기 자본주의의 진전에 따라 부유층에 올라선, 재산은 있지만 아직은 ‘교양’이 없는 신흥 부르주아들은 외형적으로 비싸고 화려한 것에 탐닉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술과 취미는 물질적으로 안락하고 정신적으로 태만한 부르주아의 구미에 맞게 변질되어갔고, 또 그렇게 되어야 했다. 별로 고상하지 않은 부르주아 대중들의 취미에 대한 화가의 영합은 의외로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화가들에 의해 촉진되어 금권과 영합했다. 이렇게 ‘타락한’ 예술과 부르주아의 속물적 위장에 대한 반항과 폭로가 일군의 젊은 화가들에 의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1863년 관전인 살롱전에서 낙선한 화가들의 그림을 모아 전시한 ‘낙선(落選)전’ 출신의 화가를 중심으로 뭉쳤던 인상주의 화가들이었다.
   이들 그룹의 리더였던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심 식사」(그림 1)와 「올랭피아」(그림 2)는 당시 시민들의 격분을 사고 급기야 황제도 공개적으로 음란한 그림이라고 선언하게 된다. 그림 속 누드의 매음녀가 보이는 도발적인 태도와 시선 앞에서 관객들은 미의 이상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고, 경악했고 분노했다. 그러나 정부가 주도하는 관전인 살롱전에서는 마네의 작품보다 훨씬 생생하고 도발적인 나체의 여인을 그린 그림 「비너스의 탄생」이 파리 전체의 갈채를 받고 있었고 황제는 그 그림을 구입하였다. 아카데미의 화가 카바넬(Alexandre Cabanel, 1823~1889)의 그림은 매우 외설적인데도 불구하고 그림 속의 여인이 바로 ‘비너스’였기 때문이었다. 당시까지 비너스를 바탕으로 제작된 여성 누드는 ‘정숙’과 ‘진리’라는 존재로 인식되도록 절제된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독교적 이상이나 규격화된 형태로 성스러운 미(美)와 고상함을 캔버스에 그려내던 시대, 전통적인 누드화 속의 벗은 여인은 눈을 감고 있거나 다른 곳을 보고 있음으로써, 관람자들이 그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한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응시할 수 있었는데, 화가는 비너스를 방패막이로 삼아 관능적인 나부를 그리고, 신흥 부르주아들은 그 표면상의 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마음 놓고 나체를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네의 「올랭피아」에서는 반대로 모델이 위선 떠는 관람자들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능동적으로 이들의 시선을 좇고 있기 때문에 어쩐지 불편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의 그림이 부르주아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은 근본적 이유, 즉 마네의 ‘죄’는 벗은 여자를 그렸다는 것보다도 벗은 여자를 가리고 있던 ‘위장’을 걷어낸 점이었다. 고무처럼 탄력 있는 매음녀 올랭피아의 육체는 어물전에 진열되어 있는 생선처럼 실무적으로 제공되어 상업적 거래에 대한 여성의 주도권에 초점을 맞추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그녀의 시선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다는 환상은 적어도 그녀에 관한 한 낡은 수법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의 저자 이택광 경희대 교수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근대의 등장이며 마네는 근대 시민사회와 함께 등장한 노동계급의 출현을 알아채고 새로운 근대의 풍경을 그려낸 것이었다.
   마네가 열어놓은 이 길로 인상주의자들이 먼저 떠났다. 흔히 인상파는 ‘빛의 양감에 의한 대상의 변화와 그 순간의 포착’이라는 회화 기법상의 새로운 시도를 한 19세기 후반의 일군의 미술가들을 총칭한다. 인상파 화가들은 마네의 도발 이후 바로크나 로코코 풍의 궁정적·귀족적 장엄과 위용이나 향연 대신에 경마경주, 야유회, 카페, 극장, 선술집, 만국박람회, 기차역, 도시의 대로나 뒷골목, 보트놀이 등 신흥 부르주아들의 평범한 삶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근대 시민사회로 전환되는 도시화 과정에서의 제반 모습들이다.
   사회학자 홍석기는 인상주의 미술이 그 시기를 앞선 예술로써,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하는 과정에 기존의 규칙들을 위반하면서 그리고 주류 대중들에게 설득하기도 전에 불쾌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적 운동이라고 하였다. 마네의 그림에 대한 소동은 당시 여전히 사회적으로 큰 권위를 지니고 있던 아카데미파와 거기에 대항하여 등장한 혁신적인 전위파, 즉 아방가르드파의 대립이다. 또한 인상주의 미술은 미학에서의 근대적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우매한 대중 등과의 대립적인 긴장관계 또한 포함하고 있다. 대중 다수의 인습적인 것에 대항하는 소수의 반항적 시도는 오늘날 현대회화의 근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미술사가 1863년의 낙선전에서 시작된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최영 대학원생 기자  now_and_he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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