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원규 시집『오랜 우물 곁에서』서평

신 용 협(시인,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최 원규의 시집 『오랜 우물 곁에서』는 원숙한 인생 체험과 오랜 사색의 끝자락에서 얻어진 어쩌면 보석으로 비유될 시작품들을 모아 출간한 시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농축된 인생과 언어구사의 묘미는 마치 한국에서는 제삿상에 올리는 제주의 술맛과도 비유될 수 있을 듯하다. 옛날부터 술을 담글 땐 재료도 재료려니와 술을 빚는 정성은 물론 쌀과 누룩이 깨끗한 물을 만나고 알맞는 온도와 적당한 시간을 기다려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재료의 물리적 변화를 넘어서서 화학적 변화에 이르러서야 제맛이 나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의 열일곱 번째의 시집이라면 그동안 많은 시집을 출간하였으니 시인으로서의 경륜만큼이나 원숙한 경지요, 한 생애로서의 총 결산과 같은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박 용철은 「시적 변용에 대하여」에서 진주조개의 아픔이 없이는 값진 진주가 만들어질 수 없음을 말했거니와 인류가 발견한 진주와 인류가 창안해 낸 술은 또한 인류 문화의 꽃인 시에 갚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진주조개의 아픔과 술이 완성되는 과정의 기다림은 시의 탄생과 매우 흡사한 것이요, 인류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주가 <아픔>과 오랜 <기다림>을 겪고 난 뒤에야 만들어지는 것처럼 하나의 시작품도 <아픔>이 오랜 시간의 <기다림> 끝에 시라고 하는 아름다운 한 송이의 꽃으로 탄생되는 것이다.

 차례로 쓰러지는 광경은 총살의 현장이었다. 전쟁은 한참 막바지에 이르고 후퇴를 결심한 이들은 이들을데불고 갈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뒷산의 비탈길에서 담배 한 대씩 피우게 한 뒤 모두 총살한 것이다.

 

< 4행 생략 >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아직도 이 사건을 아무렇지 않게 말 할 수는 없다. 나와 네가 서로 맞지 않아 피흘린 자리에 모든 이슬이 너무 맑기 때문이다. 모든 풀이 너무 싱싱하고 파랗기 때문이다.

「풀과 이슬」

 

 최 원규 시인은 「풀과 이슬」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이슬의 맑음과 풀의 싱싱하고 푸른 것을 그 엄청난 비극에도 불구하고 「세월」에 돌렸다. 진주의 <아픔>이 없이는, 그리고 술의 <기다림>이 없이는 시의 아름다움도 탄생할 수 없는 것이다.

 

붉은 불가마에 담가 검은 뼈로 태어난다는 것은
불타는 욕망을 송두리째 뽑았기 때문이리.
모든 것을 소멸하고 비워 낸다는 것은
끝내 남아 있는 찌꺼기를 사리어 냈기 때문이리.

  < 제2연 3행 생략 >

  행여 다시 살아남기 위한
  고독한 휴식인지 몰라
  나도 숯이 되어 다시 살아날 채비를 위해
  오랜 고요 속에 묻힐
  진정한 뼈의 사리를 찾기 위함인가

「숯이 되어」

 

  최 원규 시인은 「숯이 되어」의 시에서 <뼈>는 이제 <사리>가 되기 위해 준비가 다 된 것처럼 느껴진다. 좋은 시란 이처럼 <아픔>과 <기다림> 끝에서 태어나는 어쩌면 불행한 꽃인지도 모를 일이다. 또 다른 수작으로 꼽을만한 시들은 예컨대 「눈이 내리는 오후」「잠의 연습」「죽음을 말한다」 「짐을 꾸리며」「죽은 자를 위하여」「오랜 우물 곁에서」「작은 유산」「관음보살 앞에서」「갈대숲을 지나며」등의 작품이 특히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시인의 한 생애가 득도의 위대한 길 위에서 자신과의 싸움이 내밀하게 이루어질 때 좋은 시가 탄생된다면 니체가 말하는 『비극의 탄생』도 이와 같은 것이리라.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