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섬 안면도를 다녀와서

  청년들의 배타심

  우리들의 두번째 만남은 시작부터 비정상적이었다. 병민이조가 안면도 최남단인 고남으로 들어가 만났던 설진스님의 집으로 우리의 2박장소가 변경된 것이다. 원래 7시 터미널에서 만나 방포해수욕장에서 제보자를 만나기로 했으나 「땡초」로 통하는 이분과의 만남은 가장 특별하고 평생 기억에 남을만한 사건(?)이었다.
  막차를 타고 팀 전체가 고남에 도착한 것은 저녁 아홉시경, 가로등도 하나없는 비포장산길을 삼십분쯤 덜컹거린후였다. 스님의 집에서 저녁을 지어 먹고 빨리 잠자리에 들길 고대했으나 다음날 정오까지 한시도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일일일식 기도를 드리고 하산한 스님은 사람과의 만남을 굶주리기라도 한듯 계속 이빨을 풀며 술을 마셨다. 곧 느닷없이 현지 청년회 「한울타리」회원의 방문이 있었고, 그들은 작년 안면도 항쟁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평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나같은 건강한 열명 남짓의 청년들은 자신의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 대단하였다. 반면 우리에 대한 경계의 눈빛도 역력했는데, 그건 낯선이를 대할때 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배타심이라 생각되었다. 어느분은 이런 컴플렉스가 태안 서남중 교사폭행사건의 근본원인이라고 파악하였다.
  고향과 고향사람에 대한 애정과 신뢰, 그리고 타지인에 대한 경계, 「우리일은 우리가 한다ㆍㆍㆍ.」이것은 적어도 순수한 우리의 민족의심에 틀림없다. 부르조아 민족의식의 허울은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절대적인 민중의 민족의식이다. 자생일 수 밖에 없는 이 텃세도 결국 노동해방 문화의 주도하에 비로소 완전하게 민족의 정서를 담아낼 수 있게 되리라!

  바람아래의 절경

  우리와 청년들의 딱딱한 자리는 그것으로 끝나고 새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 이름도 특이한 「바람아래」. 자정을 넘기나 시간에 봉고를 타고 안내된 이곳은 안면도 최남단의 고남의 명물이었다. 때마친 휘영찬란한 보름달이 우리의 야밤 밀월을 받아주는, 한마디로 절경이었다.
  파도의 흔적을 간직한 물결치는 모래, 밤이라 그런지 달빛을 받아 그런지 물을 푸르고 투명하여 속살을 훤히 비치고 있었다. 성급한 몇몇 친구는 옷이 젖는 것도 모르고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동굴도 있었다. 조그마한 자연굴이었다. 바닥에 흰모래가 깔려 있었는데 모래를 뒤척이자 빛이났다. 모래에 섞인 인 때문이란다. 인이 빛을 반사해서 반짝이는 것이 신비하게만 느껴졌다.

  할매바위와 스님과의 이별

  청년회원들은 돌아가고 우린 땡초와 일대일로 마시기 시작하였다. 문학과 문학도의 정서와 패기ㆍㆍㆍㆍ.대충 그런 것들을 얘기했던 것 같다. 한계에 달한 내 육체와 정신은 떠오는 먼동의 생기와 상반되게 점점 허물어져 갔다. 땡초의 무한한 체력과 주력(술 먹는 능력)에 감탄하면서 우린 새날을 맞았다. 스님은 자신의 소유인 양 소중하게 생각하는 「할매바위」란 곳까지 우리를 안내하였다.
  할매바위는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괴암으로서 뾰족하게 솟아 어른 키 두세배를 올라가 다시 평평해져서 여덟명이간신히 발을 딛고 서 있을만한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았다. 양식장으로 사용했던 것 같은 수만평의 갯벌이었다. 지금은 오염대문인지, 정부의 다른 의도때문인지 폐허처럼 버려졌고, 두세명의 아주머니가 도랑 속을 살피며 무언가 찾고 있었다.
  스님집에 도착하자마자 곯아 떨어졌고, 오후 5시경 떠날 채비를 할 수 있었다. 못내 아쉬운 듯 쓸쓸한 눈빛을 보내며 스님은 문밖까지 배웅나왔다. 알 수 없었다. 무엇이 스님을 수행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고, 무엇때문에 우리에게 그토록 친절했던가ㆍㆍㆍ?

  마지막 밤의 상념과 한상돈씨
 
  차를 한번 갈아타고 방포 해수욕장에 도착하였다.
  간단한 평가시간이 끝나고 뒤풀이하는 가운데 우리들의 얘기도 두런두런 나눌 수 있었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 주위는 고요했고 사흘간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연은 아름다왔고 그 넉넉함을 인간에게 베푸는 데 전혀 아까와하지 않았다. 허나 인간은 그렇지 못하였다. 자신의 하나를 얻기 위해 남의 두개와 자연의 그것까지 빼앗기에 혈안이었고, 결국 이 평화로운 섬에까지 온갖 쓰레기와 「기계」를 뱉어 놓았다. 잠 속으로 빠져드는 몽롱한 기억속에 애써 찾아낸 나의 결론은, 답답하고 아쉬움뿐이었다.
  드디어 마지막날, 떠날 채비를 한 후 팀장이 잠깐 인사드렸던 한상돈씨를 찾아갔다. 그는 끼가 있는 사람이었다. 남사당패의 일원으로 전국을 돌며 공연하고 있었고 각종 시위나 집회에 참여하는등 스스로의 표현대로 운동가였다. 그러나 그는 낭만적인 운동가였다. 굳이 고전혁명운동가에 대해 일리치가 사용한 비판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의 한계는 뚜렷하였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앞으로의 후손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말을 하였다. 가진 자들이 각성하고 나눠줄 때가 됐다는 말을 하였다.
  민중을 모래에 비유하면서 제각기 떨어지면 모래밭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단단히 결합하면 방파제가 된다고 하였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허나 그는 모래를 굳어지게 하는 접착제의 역할을 하는 전위활동가와 그 공간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고 보니 작년 안면도 항쟁이 법적 테두리 안에서의 지역 생존권 싸움이었고 전혀 반정부, 반독점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지금의 사회변혁 운동의 한계인 모든 현상의 집약에 불과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태어난 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던 수정처럼 맑고 뚜렸한 고남 하늘의 북두칠성, 절경바람아래, 붉은해와 노을과 파란 바다가 함께 연출한 방포의 일몰 등등이 생생하게 되살아 났다. 그리고 못내 아쉬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나의 사지를 붙들고 늘어졌다. 가지 말라고, 다시 오라고ㆍㆍㆍ.<끝>

  남기택(국문ㆍ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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