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진리와 존재하는 진리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씨 재판의 충격

  「법정에서 사용할 가능성」때문에 사탕까지 압수한 가운데 진행된 지난 28일 서울형사지법에서의 검찰과 재야간의 도덕성 싸움」이라 일컬어지는 김기설씨에 대한 재판은 초기 충격의 파장만큼이나 국민들에게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이에 검찰이 유서대필의 혐의로 제시한 몇가지 근거에 대한 반박을 통해 사건의 본질에 대해 말하려 한다.
  검찰이 강씨를 구속한 근거는 첫째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의 필적감정이다. 국과수는 김씨유서와 강씨가 홍씨(김씨의 여자친구)에게 준 메모, 85년 강씨의 경찰자술서 필적이 동일인의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국과수는 87년 박종철 고문살인 사건때에도 거짓 감정한 전력이나, 관례를 어기고 이번에는 실장 1인이 감정하는 등 국과수의 감정은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한겨레신문이 중앙필적감정원에 의뢰한 감정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일본의 감정기관에 의뢰한 필적감정(국과수가 추상적인 결론만 발표한 것에 비해 풍부한 실례와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에서 유서와 강씨의 필적은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둘째 홍씨의 진술이다. 홍씨는 검찰에서 김씨의 필체가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홍씨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 홍씨는 5월 31일 이후 검찰의 보호(말이 보호지 공개증언을 막기 위한 감금)를 받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진술은 아무런 증거도 될 수 없다.
  위와같이 검찰의 주장은 신뢰할만한 어떠한 증거도 없으며 오히려 갈수록 검찰의 조작이 탄로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검찰은 공소유지가 어렵게 되자 강씨의 지난 행적(혁노맹 사건)을 문제삼고 있다.
  정권이 검찰을 내세워 유서대필시비를 일으킨 것은 강경태 타살사건 이후 그동안의 노동자들의 불만(한자리수 임금인상, 두자리수 물가폭등, 5공보다 더 많은 양심수등)이 정권의 살인에 대한 분노와 겸쳐 6공의 존재기반을 위협하자 국민의 관심을 유서대필 문제로 돌려 투쟁을 가라앉히고 5월 위기의 돌파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막강한 물리력과 언론을 앞세워 만들어낸 거짓 진리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 참인 진리를 이길 수 없다.
  역사에서 언제나 만들어진 진리는 존재하는 진리에 의해 자신의 본질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김정진(건축공ㆍ2)>

  「나」의 존재는 주인된 인식속에
  
  학교뱃지를 착용하도록 하자

「나」라는 존재는 집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어떠한 존재이며, 존재자이어야만 하는가? 물론, 한 가정의 구성원이며, 학교에서의 한 구성임을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주인」이어야만하며 주인이다. 2학기 개강후 나는 계속 문과대 뺏지인 「백색」의 학교뺏지를 달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쑥스러움-다른 사람들이 하지않는 고로-과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흔히 나붙는 대자보에서 「주인됨」을 강조하는 문구들을 숱하게 읽어왔고, 「주인됨」을 강조하는 학생회 임원들 조차도 가슴 한쪽에 학교뺏지를 달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물론 뱃지를 달고, 안달고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그러나 주인됨이란 무엇인가? 강의실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빈컵을 버리고, 낙서하는 것이 「주인됨」이며, 정당한 권리행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학교뺏지를 착용하는 사소한 것부터 실행하는 것이 「주인됨」을 위하는 기본적 정신자세가 아닐까한다. 거창하게 내세우는 구호보다는 당장 실행 가능한 것부터 실시하는 것이 좀더 바람직한 방향일 것이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학교가 뱃지를 차면 이상한 눈으로 보고, 휴지를 주우면 창피한 의식을 갖게 되었는가? 며칠전 한 친구가 나의 뱃지찬 모습을 보고 농담조로 『혼자 모범생티는 다내냐? 남들은 전부 하지 않는데 왜 너혼자 그래. 어용 학생이구먼. 사람이 현실적이어야지』하는 것이었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나는 거창한 구호를 외쳐대지는 않지만 분명 자랑스러운 충남대학교 문과대학의 학생이며, 이 학교의 주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내 학교에 대한 자긍심없이 학교의 발전이 있을 수 없으며, 자신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고ㆍㆍㆍ.뺏지를 착용하는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여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이충구(철학ㆍ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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