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 - 소비’구도의 ‘문학 춘추전국시대’

  올해는 ‘문학의 해’다. 그래서 96 문학의 해 조직위원회는 이런저런 사업계획안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문학의 해 사업계획안이 지나치게 소모적이고 일회적인 행사에 치중하고 있고, 게다가 이 사업을 추진하는 문인들이 군사정권 시절에 친정부적인 발언과 활동으로 여러 차례 물의를 일으킨 한국문인협회 회원들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벌써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문학인의 창작 의욕을 고취할 수 있는 뜻깊은 ‘문학의 해’ 행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처럼 중대한 문제에 직면한 원인은 물론 이 행사를 주관하는 문화체육부가 문학과 문학단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행사를 치르려고 하는 데 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문학의 해에 우리가 진지하게 검토할 사항은 현단계 우리 문학의 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바람직한 진로를 모색하는 것일 터이다. 90년대에는 그 이전에 비해 문학의 힘이 현저히 약화되고 문학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눈과 마음이 문학이외의 것에 가령, 영상매체에 혹은 전자매체에 쏠리고 있는 현상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문학의 사회적 역사적 호소력의 약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지금껏 지켜왔던 문학의 위상에 위협적인 이같은 상황의 타개를 위한 문학적 노력이 매우 절실한 때가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짧은 글은 이런 노력에 보탬이 되고자 90년대 문학의 흐름을 장르별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90년대 비평을 조망해보자. 90년대 비평은 리얼리즘. 포스트모더니즘, 표절, 외설, 신세대문학, 대중문학 등 다양한 쟁점을 다루면서 90년대 문학과  90년대 문학의 새로운 양상을 구명하려고 애썼다. 비록 90년대 비평이 이런 쟁점들을 지속적이고도 깊이있게 탐구하지는 못했다하더라도 이런 쟁점에 적극 대응함으로써 그 기본적인 소임에는 충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90년대 비평계에서는 미시비평이 풍미하고 있음이 금방 눈에 띈다. 미시비평이란 작품에 대한 치밀한 분석에 치중하는 ‘작은 이야기’의 일종이다. 이런 미시비평은 “작품이란 ‘부분’에 촛점을 맞추고 작가, 작품, 독자, 문화환경 등으로 구성되는 작품의 ‘전체’를 등한하기 때문에 대중과의 소통을 아예 무시하는 자폐적인 비평이나 독자와의 친교를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 닫힌 비평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고, 마침내 그런 비평은 사회와 격리되고 역사와 분리되어 고독한 길을 걷곤 한다.”(참고 ‘문학의 위기란 무엇인가’, ‘리얼리즘의 아름다움’, 92쪽) 이런 미시비평은 문학의 위상 재고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에 치중하고 있는 90년대 비평은 크게 반성해야 하겠다.
  다음으로 90년대 소설을 보면, 바야흐로 이 땅에 소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당장 떠오른다. 근래 엄청나게 많은 소설들과 유사소설들이 쓰여지고 유포되고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소설은 지천이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서 노정되고 있는 가장 뚜렷한 현상은 국적도 생산자도 분명하지 않은 상업소설의 기승이다. 이는 외국의 저급한 소설을 마구 수입하여 판매하는 출판사가 많다는 것과 인기로 돈을 벌기 위해 소설이라는 상표로 단언어제품을 양산하는 작가들이 혹은 자칭 작가들이 근래 급증했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들의 아류들과 함께 수준낮은 소설이나 상업소설의 기승을 조장하고 있다. 읽을 가치가 거의 없는, 바로 이런 소설들 때문에 우리의 소설 시장은 지금 매우 혼탁해졌다. 그뿐 아니라 이런 유행의 소설(?)들은 소설이란 남아도는 시간을 죽이는데나 동원되는 ‘하찮은 읽을거리’라는 견해를 빠른 속도로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눈요기 거리로서의 소설에 맞서 소설특유의 위엄과 가치를 보여주는 정신문화재로서의 소설 또는 뛰어난 언어예술로서의 소설도 꽤 있다. 이런 소설은 전반적으로 전래의 소설문법을 착실히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는 사실주의적 기술에 도전한 파격적 소설이 근래에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또한 분단현실, 노동현실, 농민현실등 민족ㆍ민중현실을 본격적으로 파헤친 ‘큰 이야기’로서의 소설들보다는 일상생활이나 개인적 경험을 조형한 ‘작은 이야기’로서의 소설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그리고 자서전적인 소설 혹은 사소설, 성장소설, 후일담소설로 표기될 수 있는 작품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런 소설들은 작가의 육성을 크게 담아서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설은 ‘회상의 예술’임을 거듭 천명한다. 이러한 특성을 노정하고 있는 90년대 소설을 자세히 살펴보면 남성작가들 못지않게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들보다 더 화려하게 여성작가들이 그 생산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마지막으로 시를 보자. 시는 90년대에 철저히 소외되고 있는 장르다.(이 말이 제발 망말이기를!) 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근래 아예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런 관심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80년대를 시의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시가 80년대에 각광받은 장르임을 고려할때 90년대 시는 매우 불행하다 하겠다. 앞으로도 이런 사정은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시에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인 최근의 문화적 환경만이 90년대 시의 위축을 유발한 것은 아니다. 시인으로 행세하는 많은 시인들이 그 이름에 걸맞는 작품을 선보이지 못하고 설익은 시를 마구 양산하는 풍토가 그같은 사태의 큰 원인이다. 그런즉 90년대 시의 새로운 활로에는 그 무엇보다 우리 시인들의 시적 쇄신이 매우 필요하다 하겠다. 어쨌건 시의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그 미래마저 불안하더라도 시인이 시의 존엄함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시는 어느땐가 다시 문학의 정상에 나아가 예술의 절정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강화하는 시들이 드물기는 해도 우리 주변에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점에서 우리는 이런 시의 홍보와 수용에 좀 더 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김태현<문학평론가ㆍ순천향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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