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월에는 서울 한달 살이를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서울 한달 살이를 결정한 것은 작년 10월에 있었던 한국여성학회 세미나 때문이었다. 대부분 서울에서 하기 마련인 학회 세미나가 우리 학교 인문대 강당에서 열렸다. 서울 대학의 교수 뿐 아니라 부산이나 대구, 전북에서 온 교수, 석사생들도 있었다. 그 날 나는 ‘여성젠더학과가 대전의 충남대에 있는 것의 의의’에 대해 발표했는데,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앞선 교수님들의 발표가 늦어지면서 3시 반으로 예정되었던 석사과정생들의 발표가 5시로 미뤄졌고, 일부 서울 사람들이 기차 시간에 늦는다고 강당을 떠났다. 열심히 준비한 발표를 절반의 사람들 앞에서 하려니 신이 덜 났다. 부산 사람들도 아직 안 갔는데…….

  세종시에서 일하던 때 우리 팀에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출퇴근하는 직원이 있었다. 회사에서는 서울 남부의 양재역으로 셔틀버스를 보내주었다. 물론 대학에 오기 전에는 나도 ‘인서울’을 바라던 때가 있었다. 대학 때부터 건대 앞, 경리단길, 홍대 등지로 매해 몇 회씩은 서울에 놀러다니면서 서울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라는 것은 익히 봐왔다. 그러나 그것을 겉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은 다를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도대체 뭐가 있길래 저기 살면 달라지는 걸까? 저기서 살기를 저토록 바라는 걸까? 무슨 환상적인 것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서울의 한달 살이용 월세방을 구하면서 나는 <원미동 사람들> 중 ‘멀고 아름다운 동네’(1986)의 ‘그’가 되는 기분을 느꼈다. 대전에서는 월 35만 원이면 6평의 오피스텔에서 지낼 수 있는데 서울에서는 55만 원을 내야 2평짜리 고시원에서 잘 수 있었다. 지하철과 도보에 사람이 그렇게 많고 기운이 쪽쪽 빨리는데 잠조차 유리로 된 화장실 벽에 부딪히며 자고 싶진 않아서 비슷한 값의 조건이 나은 방을 찾아가자, 부동산 어플 위의 핀은 자꾸 서울 외곽으로 밀려나갔다. 결국 인천 계양구까지 나가자 그곳이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과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겨울 트럭을 타고 서울에서 원미동으로 이사가며 좌절하던 ‘멀고 아름다운 동네’ 이야기가 멀지 않았다.

  구미에서 태어나 김해에서 중학교를, 거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대전에 오기 전까지 서울이 ‘매우 먼 곳’이었다. 

  부산대에 다니는 친구는 “부산대 애들은 부산대가 부산의 서울대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근데 서울대를 안 다녀본 내가 그 말을 이해할 리는 없고. 이해할 수 있는 건 대전에서 충남대 다니는 친구들이 느끼는 패배감이다. 이건 대전이 서울에서 너무나 가깝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다. 부산대 친구들이 굳이 서울의 ‘부산대보다 입결 높은’ 대학과 부산대를 비교하지 않고 승리감을 느낄 때, 오히려 자주 수도권에 왔다갔다하고 가까운 과거에는 대전역에 서울 사람들을 모시러 가야 했으며 내가 발표하기 전에 자리를 떠버리는 그들에 대해 패배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대전 토박이가 아닌 내가 대전의 경계에 발을 걸치고 있기에 관찰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지도 위 서울을 두르는 경계선은 우리가 성공이나 정상이라고 부르는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직 서울 살이를 다 마치지 않아서 혹시나 환상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판타지는 욕망으로 생기는 허상인데 반해 환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각축장에서 사람들은 분열되고 분열은 환상이 실체를 드러내기 전부터 실재한다. 분열은 실컷 겪었으니 환상을 만드는 재료가 무엇인지 한 달간 면밀히 탐구해보려 한다. 환상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다면 그 또한 슬플 것만 같다.

공연화 (여성젠더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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