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침투작전

  클리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전형적인 것’ 정도가 되겠네요. 첩보영화에선 지령을 내리는 수뇌부가 “자~ 선수 입장” 과 같은 말도 안 되는 대사를 치는 것도, 로맨스 영화에서는 부스스하던 주인공이 멀끔하게 차려입고 재회하는 것도, 스릴러에서는 제일 말 안 듣는 사람이 먼저 죽는 것도 다 일종의 클리셰입니다. 그렇다면 8월의 클리셰는 무엇일까요. 더운 날씨, 내리쬐는 태양. 다름 아닌 여름이죠. 그리고 여름하면? 바다를 떠올리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강이라고 대답하신 분들은 조용히 신문을 덮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리저리 치인 탓에 지난 한 학기는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2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청춘을 불태울 만한 과업을 찾고 싶었죠. 근데 아까 뭐라고 했죠? 여름 하면 바다 아니겠습니까. 이번 이야기는 네 청년의 바다 여행 이야기입니다.

  같은 동아리를 하고 있는 후배가 어느 날 물어오더군요.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여행을 가게 됐다고 말이죠. 우리 충남대학교 학생이라면 많이들 가는 대천이나 동학사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고 합디다. 저는 그저 흥미롭게 듣고 있었고 그가 말했습니다. “형도 가야 돼” “엥?” 그렇게 저희의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단톡을 파고 장소를 정하고 고민 끝에 여수를 목적지로 삼았죠. 좀 뜬금 없긴 하지만 여러분은 인간사회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대한민국의 기본이념은 민주주의이기에 모두가 다 함께 이 나라를 굴릴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앞에서 이끄는 소수를 절대 다수가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구조로 세상은 돌아가고 있습니다. 얼핏 역사학 강의 같기도 한 이런 발언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데 저희 여행도 그랬거든요.

  여행 출발일 일주일 전까지 별 말 없이 잠잠했던 단톡방은 여행 멤버 중 한 명의 최후통첩을 시작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게임도, 여행도, 누군가 한 명이 캐리해주지 않으면 구색을 갖추기는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신기할 정도로 역할 분담이 잘 되었다는 점입니다. 누구는 숙소를 찾고, 누구는 코스를 짜고, 누구는 응원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대략적인 일정이 정해졌고 예약도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야심 차게 출발한 여수 여행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8월 28일 오후 12시 10분 경 저희는 여수엑스포역에 도착했습니다. 밖은 날씨가 아주 화창했고 다른 관광객들도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오늘은 운이 아주 좋다며 다들 신나있던 와중 한 명이 화장실을 가기 시작하자 다들 따라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블루투스 연동이 되어있었나 봅니다. 잉여수분을 배출하고 손을 씻는 3분여 동안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한 겁니다. 무슨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도 아니고 근처에 소방차가 온 것 마냥 마구 퍼부었습니다. 진지하게 처음엔 영화촬영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비는 잠잠해졌습니다. 계획한 대로 근처 식당에서 게장백반으로 점심을 때웠고 식사를 마칠 때쯤 하늘은 맑아져 우산 없이도 나다닐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음 일정이었던 스카이타워 관람을 위해 이동하던 중 또또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담이지만 이런 식으로 비가 왔다 안 왔다하며 하루 종일 날씨는 오락가락했습니다. 비가 오면 오는거고 안 오면 안 오는 거지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하늘이 나랑 밀당하는건가 싶다가도 딱히 천지신명께 플러팅 한 기억은 없는 것 같아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대강 관람을 마치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 중이었습니다. 기사님께서는 비가 왔다 안 왔다 한다며 날씨가 해괴하다고 하시더군요. 마침 지쳐있던터라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며 조금은 툴툴거리기도 했습니다. 기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학생, 날씨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인생과 같을지 몰라요. 항상 맑을 수도 없고 항상 어두울 수도 없는 것처럼. 매번 일희일비하지 말고 무던하게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기 봐봐요. 어느새 날이 싹 개었잖아요.” 잠시나마 투덜거렸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감동도 잠시, 이별의 순간은 다가왔습니다. 좋은 말씀 해주신 기사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고 기사님은 유난히 환하게 웃으시며 저 멀리 사라지셨습니다. 차에서 무심코 바라본 바지 앞섶 사타구니에는 아까 맞은 빗자국이 선명했습니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으면 누가 봐도 출처는 내 몸이겠구나 할 정도의 절묘한 위치였습니다. 이건 뭐랄까.. 기사님께서 웃으셨던 이유는 나한테 있을지도 모르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홍민기 (사회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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