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수탉의 울음이 새벽을 깨울 때까지

  8월의 숫자들이 빠짐없이 옛것이 되었다. 이달의 태양은 저녁의 시간까지 훔쳐가며 마음껏 열기를 발산한 후에도 미련이 남아 잠 못 이루는 열대야를 남겨두며 여전한 심술을 부린다. 마치 자신의 존재감을 절약하는 방법을 잊은 듯이. 이 계절이 품은 욕심의 수명이 다한 후에는 때를 기다렸던 동장군이 이내 나타나 으름장을 놓겠지만 나는 그 시간의 도래를 기꺼이 반길 것이다. 여름은 내게 그렇게나 버겁다. 반갑지 않은 뜻밖의 손님처럼. 또 여름은 그토록 고약하다. 플레이리스트를 채운 지나간 인연을 그리는 노래와 후회와 자책으로 점철된 목소리들에 스며있는 그 감정을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지면 위에 모든 것들을 이지러뜨리려는 듯이 무섭게 타오르는 볕의 하악질을 볼 때면 밀린 숙제 같던 상념과 감정들을 정리할 의욕은 전부 녹아 없어지기 마련이다. 몇 번씩이나 곱씹고 남은 잔해들마저 전부 태워 없애고 나서야 그것을 공연히 털어낼 수 있는 내게 여름의 태양은 그렇게나 고약하다. 아무래도 지난날을 충분히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후회하는 것은 드러냈던 복숭아뼈가 시려 긴 양말을 찾을 때쯤, 늘 푸를 줄로만 여겼던 활엽수들이 낙엽이 되기를 자처할 그때쯤이 돼서야 마저 해야겠다.

  나는 가을을 사랑한다. 가을에 태어나 원래부터 그런 구조로 설계돼있는 것처럼 응당 당연히도. 냇물이 원래의 방향을 거슬러 흐르는 일이 없듯이 그렇게, 감히 거스르지 않고 가을을 사랑한다. 나는 만추에 들어선 11월의 어느 날 태어났다. 얼굴과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 친할아버지로부터 이름을 받아들었고 나로서의 삶을 출발했다. 이제껏 나는 어머니로부터 공짜로 생명을 얻었던 그 날의 의미를 여러 번 고쳐 썼다. 인하대 후문의 3평짜리 반지하 쪽방에서 맞은 스물한 번째 생일엔 알량한 감상에 젖을 틈이 없었다. 새로운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던, 시험을 열흘 앞둔 수험생이었기에 자축을 이듬해로 미뤄야 했다. 라면 한 개를 끓였고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꺼내 마셨다. 그때의 최선이었다. 설핏 잠들어 그대로 새벽을 맞이한 그 날은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꽤 쌀쌀했던 가을의 어느 날로써 기억 속에 숨어 있다. 그래, 나는 가을을 사랑한다.

  또 하루의 가을날. 몇 번째 생일이었나, 아버지는 오늘만큼은 어머니를 한 번 더 생각해줄 것을 주문하셨다.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문득 눈에 들어온 어머니의 낡은 지갑을 바꿔드리고 싶었다. 왜 하필 그때 아버지의 그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는지. 태어난 날을 겸연쩍게 보내왔다는 그 사람의 말에 나도 그러길 결심했다. 어색하게 고요한 시간을 보내며 내게 삶을 허락해준 부모님께 전하는 감사 인사로 온 하루를 채워 넣자고. 나와 닮은 방식으로 이미 살아가던 그 사람과 함께. 그러고자 결심케 했던 그 사람에게 목소리가 닿는 일은 이제 없겠지만. 나는 섣불리 기대하는 사람이면서도, 그 행위의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무책임하게 미래를 기약하고, 계절을 무대 삼아 그리게 될 장면들을 상상하고 말았다. 항상 나는 그렇게 내심 온기를 기대해서 그것이 내게 향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을 때 불현듯 다가오는 커다란 공허함을 쉽게 마주하지 못한다. 쌓아온 모든 짐을 덜어낸 3평짜리 쪽방에 웅크려 앉았을 때만큼의 공허함. 이젠 서로의 가을이 다를 것이라는 확신에서 오는 상실감이 나를 잔인하게도 갉아먹는다. 올해의 가을은 어떠려나, 뼈가 다 시리도록 추우려나. 아니면 의외의 시원함에 미련의 새싹들이 다 말라버릴지도. 그것이 궁금하다. 어서어서 걸음을 재촉해 달려왔으면. 사랑하는 만큼 끔찍해 고개를 돌려버릴 나의 계절.

김호민 (불어불문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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