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의 에리얼(좌)과 실사영화의 에리얼(우) 인포/ 김민수 기자
애니메이션의 에리얼(좌)과 실사영화의 에리얼(우) 인포/ 김민수 기자

  빨간 머리에 하얀 피부, 디즈니(Disney)의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주인공 에리얼은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존재다. 애니메이션을 안 본 사람도 OST인 ‘언더 더 씨(Under the Sea)’는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하다. 이처럼 많은 대중에게 사랑받아 온 ‘인어공주’가 지난 5월 실사 영화로 재탄생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엇갈렸다. 영화 자체의 작품성은 물론 에리얼 역에 흑인 배우인 ‘할리 베일리’를 캐스팅한 것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에 따라 ‘흑인 인어공주’를 두고 “정치적 올바름이 작품을 망쳤다”는 비판이 거세다. 

 

  정치적 올바름은 무엇인가 

  ‘인어공주’로 화두에 오른 정치적 올바름은 뉴스나 칼럼 등지에서 흔히 접할 수 있을 만큼 자주 쓰이는 표현이 됐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란 ‘언어나 문화 등 다방면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기 위한 움직임’을 가리키는 용어로, 시대나 학자마다 정의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위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사실 정치적 올바름은 오래전부터 쓰였던 표현이지만, 과거에도 지금의 의미처럼 쓰였던 것은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본래 공산주의자들이 당론에 맞지 않거나 노선이 다른 인사를 지적할 때, 미국인들이 파시즘을 비판할 때 쓰였다. 다시 말해 “동지의 노선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소” 같은 식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이후 진보와 보수 진영이 다문화주의나 사회적 다양성을 두고 논쟁을 벌였고, 이를 거듭하며 지금의 의미로 차츰 변화했다.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은 다양한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인종적·성적·문화적 차별이 담긴 표현을 지양하거나, 나아가 차별적인 기존의 언어를 중립적인 언어로 대체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을 대상으로 속칭 ‘N-Word’를 자제하는 것이나 살색을 살구색으로 바꿔 부르는 것도 차별이 담긴 표현을 지양하거나,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창작물과의 조우

  그런가 하면 창작물에 정치적 올바름 색채가 가미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간 창작물에 드러나지 않았던 흑인, 성소수자 등과 같은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거나, 그런 등장인물에 긍정적인 설정을 덧입히는 식이다. ‘디즈니 프린세스’의 변화가 좋은 예시다. 백설공주부터 인어공주(애니메이션)까지 1990년대 이전에 출시된 이른바 ‘오리지널 프린세스’들은 하나 같이 3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착하고, 아름답고, 하얀 피부를 가졌다는 점이다. 캐릭터에 부여한 서사도 비슷하다. 오리지널 프린세스들의 서사는 전부 ‘왕자님과 결혼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마무리로 일관한다. 마치 여성은 수동적인 존재고, 여성의 종착지가 결혼이라 말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캐릭터의 묘사에 있어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그런 디즈니 프린세스에 전환점이 된 것은 ‘알라딘’의 여주인공 ‘자스민’의 등장이다. 그녀의 짙은 흑발, 태양에 그을린 듯한 갈색 피부는 그간 등장했던 공주들의 외모를 생각하면 규칙을 깬 파격적인 요소다.  더욱이 자스민은 실사화되면서 당돌하고 강단 있는 여장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성격으로 묘사됐다. 영화에서만 등장하는 사운드트랙인 ‘Speechless’는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스민의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자스민 이후 디즈니 프린세스에 비(非)백인 주인공인 포카혼타스, 뮬란, 티아나를 연달아 등장시킨 것도 눈여겨 볼만 한 변화다. 

  정치적 올바름을 창작물에 녹여내는 이유는 뭘까. 우선 사회의 분위기, 정서가 이전보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이 편견과 차별을 ‘없애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것은 아직도 사회 곳곳에 편견과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편견과 차별은 나와 상대방의 차이를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으로 규정한다. 그런 토양에서는 다양성이 싹트기 힘들다. 최근 들어서는 한 사회 안에서도 다양한 인종, 문화가 혼재하다 보니 편견과 차별은 다양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러한 인식이 창작물 속에도 점차 녹아드는 추세다. 

  또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 서비스의 발전도 이런 변화에 한몫을 거들었다. 특정 국가의 콘텐츠가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소비되니 표현을 다루는 데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고 창작물 내에서 다양한 인종을 반영하는 일도 중요해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비자의 비판에 직면할뿐더러 소비자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에도 걸림돌이 된다. 당연히 이는 창작물의 매출이나 새로운 시장 개척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다소 속물 같지만, 이런 측면에서 바라봐도 정치적 올바름이 창작물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반발심을 갖는 소비자들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 학교 언론정보학과 양은경 교수는 “다문화주의와 다양성 가치 추구가 지난 몇십 년 동안 진보적인 사회운동으로서 받아들여지고,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도 이런 가치를 담으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뤄져 왔다”고 설명했다. 한편 “(과거와 달리) 이제는 다양성 가치 추구가 개인의 취향이나 즐거움보다 더 우위에 놓이는 것은 싫다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이전보다 더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최근 ‘인어공주(영화)’의 캐스팅 논란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을 접한 대중들의 거부감을 엿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에리얼은 ‘흰 피부, 빨간 머리’라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이런 이미지가 인어공주의 정체성으로 통하다 보니, 기존의 인어공주를 기대했던 이들에게 흑인 인어공주는 당혹감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에 SNS에서는 ‘#NotMyAriel(나의 에리얼이 아니야)’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전개됐다. 

  논란이 지속되면서 디즈니는 ‘가엾고 불쌍한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입장문에서 디즈니는 “(인어공주가 덴마크 작품이니) 덴마크인이 흑인일 수 있는 것처럼, 덴마크 인어도 빨간 머리에 흑인이 될 수 있다”며 흑인 인어공주의 당위성을 열변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단지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캐스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라며 소비자의 비판에 응수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답변은 소비자들이 작품을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열어주기도 하지만, 소비자의 비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독선적인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이보다 더 심한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에 건전한 비판을 건네는 사람도 ‘차별주의자’로 몰아가는 태도가 그 예시다. 

  이에 대해 양 교수는 “최근 들어서 정치적 올바름의 추구가 엘리트주의적인 일방적 가르침이나 강요로 받아들여지고, 개인의 취향이나 감정이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이 강해지는 현실”이라면서 “창작물을 통한 정치적 올바름의 실현은 더욱 섬세하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치적 올바름에 반발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부도덕하고 이기적이라 단정하기보다는 왜 많은 사람이 기존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반발하고 저항감을 느끼게 되었는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전했다. 

  그럼에도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럼에도 창작물 속 정치적 올바름이 지니는 단점만큼이나 긍정적인 의미 역시 충분하다. 창작물 속 정치적 올바름은 인종이나 종교, 성별 같은 요소와 그에 대한 편견 등을 이유로 사회 구성원을 차별하거나 몰아세우지 않아야 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소수자를 묘사하는 데 있어 편견을 배제하고 사회의 다양성을 제고하려는 노력이 이어졌을 때, 소수자들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동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풍성한 문화와 사회 통합을 이룰 수 있다. 

  이에 대해 양 교수는 “창작물은 매우 중요한 사회‧문화적 가치의 재생산 또는 변화의 수단이고, 다문화주의나 소수자와 다양성 존중 등의 가치를 대중들에게 자연스럽게 심어줄 수 있다”며 정치적 올바름의 역할과 의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창작물에서 소수자가 사실과 다르게 묘사되거나, 아예 묘사되지 않는 경우를 ‘과소 재현’이라 한다. 창작물에서의 과소 재현은 바람직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창작물로 계속해서 심화하고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과소 재현이 반복되면 소수자는 대중에게 현실보다 적게, 현실과 다르게 비칠 수 있다. 이에 대해 양 교수는 “서구, 백인, 남성, 이성애자 등이 중심이 되는 창작물에서 소외되고 과소 재현되는 집단과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퍼지게 하는 것은 사회적 양극화와 갈등이 심화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 설명했다.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때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이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정치적 올바름은 사회를 다양성이 존중되는 방향으로 이끌고, 소수자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은 너무 과해서도, 소홀해서도 안 되는 딜레마의 전형이다. 그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을 다루는 데에는 깊이 있는 고민과 대화가 필요하다. 정치적 올바름이 누군가에게는 불편이 되지 않도록,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안겨주지 않도록 말이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이 지니는 양면성 탓인지 논쟁 역시 양극단으로 치우치곤 한다. 창작물을 두고 논쟁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극단적인 논쟁은 서로에 대한 혐오만 부추기는 모양새다. 정치적 올바름에 비판을 가하면 ‘차별주의자’로, 찬동하는 모습을 보이면 ‘PC(Political Correctness)충’으로 조롱하는 모습은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극단적인 논쟁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와 같은 소모적인 논쟁만 계속되니 정작 논의돼야 할 주제는 그사이에 계류한다.

  양 교수는 “단순한 이분법, 적대적이고 대립적인 관점, 교조주의적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면서도 “오히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엄격한 자기성찰과 상대방에게 귀 기울이기”라고 조언했다. 이어 “창작자와 소비자 모두 이런 노력과 태도가 갖추어져 있는지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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