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

                                                                                   윤은성

 

결국 아무도 없는 장소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역 근처 공원들은 모두 같아 보인다.

내가 새를 배웠을 때.

내가 새를 배웠을 때.

내가 눈앞에서 떨어지는 새들을 배웠을 때. 

그 너머에 펼쳐진 건 먼지 낀 공기 속의 양평동이었다. 평평하고 텅 빈 손. 회색의 널따란

활엽수 잎.

···

결국, 이라는 말 다음 잠깐의 침묵이 

근처에 있었다. 결국 캄캄한 트렁크가 

집어삼키고 있는 것

 

이것은 나의 기억인가, 당신의 전망인가. 

묻지 않으면 당신을 만나지 않으면

얼굴 속 새들이 죽게 될 것 같다.

뛰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미용실 앞의 얼룩진 수건들은 

마르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먼지가 많은 날에는 새를 뱉어야 할까,

삼켜두어야 할까.

  1연에서 ‘결국’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무도 없는 장소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앞에 ‘결국’이 붙어 완전히 다른 느낌의 문장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 혹은 다른 이와의 전투와 갈등이 없는 곳이 ‘아무도 없는 장소’인 것 같은데, 화자는 그 장소를 생각해 내지 못합니다. 아무리 찾아 봤지만 나 홀로 있을 마음의 세계는 찾을 수 없었던 것일까요.

  3연에서 ‘내가 새를 배웠을 때.’ 이 부분은 최승자 시인의 시 <내게 새를 가르쳐주시겠어요?>에서 변용한 것입니다. 저는 <내게 새를 가르쳐주시겠어요?>를 읽고 시의 제목 중 ‘새’가 ‘세상’으로 보였습니다. 시에는 한 생애를 사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 있는데 저는 시를 보며 새의 영혼을 지닌 사람의 일대기를 느꼈습니다. 

  ‘미용실 앞의 얼룩진 수건들은 마르고 있는 게 맞는 걸까.’에서 ‘미용실 앞 얼룩진 수건’은 미용사가 염색한 머리를 감기느라 얼룩진 수건 혹은 파마약이 묻은 수건입니다. 그것은 남루하지만 일상이 이어지는 가장 현실적인 공간인 동시에 익명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그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닦아낸 얼룩진 수건도 바람에 마르고 있겠지요. 시간이 지나면 얼룩도, 상처도 다 익숙해지니까.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자신의 주저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뚜렷한 생의 실전에 뛰어들지 못한 머뭇거림 말이죠.

  저에게 봄은 머뭇거림입니다. 매번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봄. 주저할 때마다 피어나는 꽃들과 슬퍼지는 얼굴 그리고 3월의 실전. 봄을 사랑하기는 아직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의 장소에 이제 가장 또렷한 주소인 봄을 쥐고 걸어가려고 합니다. 곳곳에서 솟아나는 새의 영혼들에게 인사하면서.  

박시현 (국어국문학·4) @garnetstar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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