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감상하는 대학원생

  즈지스와프 백진스키의 1960~1990년대 작품을 중심으로

  그로부터 자신이 분리된 듯 낯설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다. 예술창작에선 진부함을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낯설게 하기(Viktor Shklovsky, 1917)를 사용하긴 하나, 내가 새롭게 느껴지는 이 일은 안녕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은 종종 강제된 모험에서 일어난다. 긴장과 스트레스, 위험이나 압박을 심하게 받을 때. 또, 위기나 충격적인 순간에도 엄습해온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익숙한 태도로는 안 되는 것이다.

  낯설음은 다르게 말해 비현실감, 그러니까 허구적이고 실제적이지 않는 느낌으로도 진술된다. 이를 이인증이라 한다. 이인증이란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거나 떨어져 있는 느낌이 지속적으로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2017) 이인증은 해리에서 온다. 해리는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해리를 사용하게 되면 고통, 공포, 죽음의 느낌을 차단하게 되는 이익이 있으나, 정신과 인격이 불안정해지고 기억의 상실이나 멍해지는 현상 등이 발생할 수 있다.”(김남훈, 2020)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언 발에 오줌 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야만 마음을 지키는 사건이 있다. 폭력, 재해, 전쟁, 죽음 등.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튀르키예의 지진뿐만 아니라, 개인의 경험에서 오는 외상도 마찬가지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장면을 마주한 순간. 해리는 외상에 대한 정당한 정신작용이다. 분열은 방어에 효과적이다. 그렇다고 합당하다는 건 아니다. 장면은 쳇바퀴 같이 반복된다. 해결되지 못한 응어리가 몸속에서 나뒹군다. 그때마다 지금-여기를 이탈하며 자신을 괴리시킬 순 없다.

  백진스키의 회화가 떠올랐다. 응어리를 건강한 방어기제로 풀어내기도 한다. 그림은 “언어를 포함한 다른 매체보다 직접적이고, 개방적이다.”(이선경, 2007)는 말처럼, 그의 메시지는 그냥 가슴에 와 닿는다.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작품도 대부분의 예술이 그렇듯 승화와 카타르시스의 과정이다. 그리고 폐허의 그림에서 늘 ‘온기’나 ‘방향’이 포착되었다. 말라버린 울분 아래, 움켜 쥔 주먹이 숨겨 있는 것 같았다. 백진스키는 꽤 유쾌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혹자는 “그의 회화 형태는 폭격 당한 도시들의 사진과 죽음과 파괴의 풍경화에 관하여 작품을 그렸고 심하게 부패하고 기이하게 변형된 인간의 모습을 연출하고자 했다.”(황령경, 2015)고 한다. 또 다른 혹자는 “그가 중요시 여긴 것은 크게 말해 정신적 환경에 의한 그리고 그의 시각에 의해 변형된 우주였다.”(진은수, 2010)고도 했다. “색은 마음의 언어이다.”(이수정, 2017)라는 말처럼, 작품에 깔리는 어둡고, 붉으며, 시퍼런 색감은 저자와 겨우 분리되고 있던 어느 그림자일지도 모르겠다.

  창작을 하는 것도 수용하는 것도 모두 매체를 함께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감동이란 그런 거니까. 내가 낯설거나 세상이 달라짐이 체감될 때, 환시적 회화에서 어떤 불안을 찾아보는 여행은 어떨까. 나는 백진스키의 그림에서 불안에 대한 정서적 감동을 느꼈다. 미술을 잘 모르지만 감상은 관객의 몫이다.

  울만(Elinor Ulman)은 미술을 환자와 치료사 사이에 전달되는 상징적 회화로 보기도 했다. 나로부터 멀어진다고 느낄 때. 폐허로 공허한 백진스키의 작품 사이에서. 

  어쩌면,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영성의(spiritual) 울림을 얻”(진중권, 2009)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동호 (상담교육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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