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의 경계를 지우면

⑦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실제 배경 남한산성을 가다

   첫눈까지 내렸으니 이제 정말 겨울이다. ‘올해는 유독 여름이 긴 것 같아’라고 불평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새삼스럽게 시간이 빠르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비단 계절 때문만이 아니다. 분명 출발선 앞에서 신발 끈 고쳐 묶고 호흡 가다듬고 있었는데 눈 깜빡한 사이 결승선까지 왔다. 개강호를 준비하면서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했는데 정신 차리기도 전에 종강호란다. 끝을 맞이하는 지금, 마치 유난히 긴 하루를 마치고 일기를 쓰는 기분이다.
   하루를 마친 후 가장 익숙한 펜을 쥐고 낡은 공책을 마주하는 것.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조잘조잘 일러바치는 일기는 언제나 정겹다. 거창하지 않더라도 소소하고, 반복되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변주하는 일기는 창피한 본성을 포함하고 있는 가장 순수한 창작물인 셈이다.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모습들도 빠짐없이 드러나기 때문에 뜨끔하기도 하고, 때로는 얼굴이 빨개지기도 한다.
   홍상수 영화감독의 영화는 꼭 일기 같다. 일 년에 한 편씩 영화를 만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거의 비슷비슷하다. 뚜렷한 주제도 없고, 짜임새가 탄탄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자꾸 그의 영화를 찾는 이유는 그런 뜨끔하면서도 공감되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홍상수 감독에게 영화는 일기쓰기와 같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서 일기장은 카메라가 되겠고,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배우들은 손에 익은 연필 정도로 비유해도 되겠다.
   홍상수 감독의 열 세번째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홍상수 감독 일기장의 13쪽을 들추는 것과 같다. 마침 영화의 오프닝도 해원(정은채)이 일기를 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일기 쓰는 모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왠지 쓸쓸하다.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표현한 편집도 인상적이다. 꿈에서 깼지만 여전히 몽롱하고, 아직도 그 씁쓸한 꿈에서 허우적대는 것 같다. 해원의 엄마는 미국으로 떠나고, 교수이자 애인인 성준(이선균)은 유부남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해원은 자신의 정체성에도 확신이 없는 모양이다. 엎드려 자는 모습을 보면 마치 꿈과 현실에서 갈피를 못 잡는 인물인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까지 꿈인 것을 알게 되면 비로소 해원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영화의 무대는 대략 두 공간이다. 하나는 신사임당 동상이 세워진 사직공원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산성이다. 그 중 남한산성은 해원의 꿈 중 마지막 무대이다. 이곳에서는 끝까지  꿈과 현실에서 헤매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찾은 남한산성은 마치 현실과 영화가 뒤섞인 공간 같다. 해원이 그런 것과 똑같이 꿈 같은 세상에 휘둘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사진 : 남한산성 수어장대 올라가는 길

   남한산성을 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앞에서 사고가 났는지 고속도로가 막히고, 이정표를 잘못 봐서 길을 헤매긴 했지만 이제 이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당황한 것은 막상 도착했을 때였다. 분명 영화 속 남한산성은 한적했는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해원과 성준이 오른 수어장대는 맨 꼭대기에 있었다. 남한산성 곳곳에 서 있는 이정표들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사람들이 가는 곳을 따라 올랐다. 날씨는 추웠지만 무척 맑았고 곧게 뻗은 나무 사이로 손을 내미는 햇살이 인상적이었다. 

사진: 영화에도 여러번 등장한 수어장대

   영화 속에서는 수어장대로 가는 길에 성준과 해원이 속에 있던 말을 모조리 꺼내고 마침내 싸운다. 영화를 볼 때만 해도 왜 저런 얘기까지 할까 싶었는데, 직접 올라가니 정말 그럴 만도 하겠다. 숨이 차 말도 못할 정도로 가파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손 붙잡고 걸을 정도로 평평하지도 않다. 힘들기도, 힘들지 않기도 할 정도로 가파랐다. 이따금씩 무릎을 짚고 멈춰 서서 그동안 묵힌 단어들을 꺼내게 만드는 경사였다.
   수어장대는 해원과 성준이 비장한 음악을 틀어놓고 대화하던 곳이다. 절대 들키지 말자던 성준에게 해원은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그냥 다 죽으면 된다고 허탈하게 얘기한다. 유독 꿈과 죽음에 거리낌이 없는 해원은 그렇게 끝까지 꿈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유부남인 교수와 그의 제자인 떳떳하지 못한 그들은 남들의 눈을 피한 이 곳에서야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있다. 적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아올린 산성은 그들이 잠시나마 손 잡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인 것이다. 마지막에는 해원 혼자 산성을 성큼성큼 걸어다니고, 울고 있는 성준을 달래기도 한다. 잔인하게도 이런 것들까지 꿈이긴 하지만 말이다. 직접 찾아간 수어장대는 관광객들로 북적이긴 했지만 그 속에서도 영화 속 장면이 떠올라 계속 맴돌게 됐다. 그러고 보니 남한산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말 못할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영화는 해원이 여전히 도서관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장면으로 끝난다. 혼자 잠들어있는 해원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이고 싶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러나 여전히 외롭고 꿈속에서 헤매는 것은 해원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꿈과 현실 속에서 확신을 갖지 못하는 해원일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모두는 정체성 없이 삶을 그저 살아내고만 있다. 해원은 그런 우리들의 단순한 은유가 아닐까.


글/사진 안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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