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와 구원의 굴레

⑦ 영화 <피에타>의 실제 배경 청계천 공구상가를 가다

   초등학교 때 꼭 남자애들은 여자애들을 때리거나 놀리고 도망가곤 했다. 그때마다 그 자리에서 응징하는 여자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도망가는 남자애들을 끝까지 쫓아가 혼내주는 아이들도 있었다. 필자는 그냥 그 자리에서 맞고 엉엉 울던 아이였다. 잽싸게 도망가는 녀석들을 따라잡을 수 없을 뿐더러 쫓아가봤자 또 놀림 받을 생각에 겁이 났던 것 같다. 그리 서럽게 울면서 집으로 가던 길은 참 멀었다. 또래 남자애들의 장난에 소심하게 집으로 숨던 딸을 보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길가다 딸내미를 놀리던 남자애들을 만나면 엄마는 으름장을 놓았다. ‘우리 수진이 아빠는 경찰이다, 너희 수진이를 괴롭히면 모두 경찰서에 잡혀간단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엄마는 사탕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군것질거리를 사줬다. 한 대 쥐어박았으면 좋으련만 항상 그렇게 떡을 하나 더 줬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엄마와 마주쳤던 녀석들은 다음날 학교에서 눈에 띄게 놀리는 일이 줄어들었다. 물론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원 상태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눈치를 살피는 게 역력했다. 단순한 꼬마 아이들의 장난을 너무 무겁게 바라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앙갚음, 용서, 복수의 개념은 이때부터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옛말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이 단순한 진리를 잊는 모양이다. 크고 작은 원망은 복수로 바뀌고 다시 끝없는 증오를 부른다.
   예수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또 ‘왼쪽 뺨을 때리거든 오른쪽 뺨을 내줘라’고도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영화관에는 부모나 자식을 죽인 철천지원수에게 잔인한 복수를 하는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다. 관객들은 ‘그래, 그럴 수 있지, 부모를 죽인 원수에겐 복수만이 정답이지’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슈퍼맨이 우주를 날아다니는 것 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말이 됐다. 이미 이성을 잃은 사람들에게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경고도 귀에 닿지 않는 먼 얘기일 뿐이다. 당장 분노와 증오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온 인생을 바치는 복수만이 살아야 할 이유가 된다.
   이미 화려한 수식어로 유명한 영화 <피에타>는 지난 호 소개했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과 감독이 같다. 자연의 흐름 속에서 돌고 도는 인생을 말하던 김기덕 감독은 이번에도 끝이 없는 복수의 굴레를 표현하려는 것 같다. 이 영화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복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용서와 구원이다. 감독은 이번에도 역시나 가장 끔찍하고 괴로운 장면으로 그 과정을 설명한다. 그러나 차마 못 볼 광경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되는 이유가 있다. 타는 듯한 증오를 결국 삼키고 용서하는 미선(조민수)과 그 구원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대해 깨닫는 강도(이정진)를 보면 슬픔과 안도가 동시에 느껴진다. <피에타>는 베니스 영화제의 불빛 속에서 가장 빛나는 상을 받았다고 한다. 황금사자상이라니, 이름부터 번쩍번쩍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촬영지는 상 이름이 민망할 정도로 허름하다. 80년대에 부흥을 이루고 이제 그 시절의 명예를 뒤로 미룬 청계천 인근의 세운상가가 이야기의 주 무대다. 이 곳은 김기덕 감독이 어린 시절 실제 일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 사진 : 세운상가의 좁은 골목


   1년동안 기행 기획을 하면서 후회한 적이 딱 두 번 있다. 한번은 지난 학기에 평사리를 갔을 때다. 언제 올지 모르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느라 한 시간 넘게 바람과 맞선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하다. 그리고 다른 한번이 바로 이번이다. 청계천의 세운상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하철역에서 조금만 걸으면 눈에 띄게 낡은 상가들과 좁은 골목들이 밀집해 있다. 이삼십년은 족히 돼 보이는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오래된 골목과 마주했을 때는 아차 싶었다. 영화 속 음침함이 눈앞에서 그대로 펼쳐졌다. 필자가 그리 대담하지 않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차라리 인기척이라도 없으면 덜 무서웠으련마는, 이따금씩 들려오는 발소리에 숨을 죽이기도 했다. 일요일 오전의 물기어린 햇살도 이곳만은 피하는 것 같다. 골목 주변은 놋물이 녹아 스며들어 온통 붉었고, 기계소리가 땅에서 올라와 발바닥을 두들긴다. 다행히 이곳에서 오래 일하셨다는 시계방 할아버지를 만나 영화 촬영지를 금방 찾았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연인들이 거니는 청계천이 바로 앞에 있었지만 이곳은 다른 세계 같았다. 영화 속의 이미지가 머리에 박혀서 그런지 공구상가의 골목들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영화에서 몇 번이나 강박적으로 보여줬던 컨테이너 박스 같은 교회도 여전히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교회 벽면에 쓰여진 ‘할렐루야는 영원하리라’는 문구를 직접 보니 숨이 찼다. 강도에게는 어린 시절 괴롭히는 녀석들에게 으름장을 놓을 엄마가 없었다. 그렇게 결핍 투성이인 강도는 일을 하러 가기 전 창문으로 저 문구를 보곤 했다. 엔딩 신에서 강도가 가장 온화한 표정으로 스스로 죽음을 맞던 도로는 어디인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안 보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 사진 : 영화 속에서 몇번 비춰주는 교회의 문구


   우리는 이미 복수를 다룬 많은 영화들을 접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영화 <올드보이>에서는 15년이나 복수를 계획했다. 온 인생의 목표를 복수에 두고 어찌어찌 그 종착점에 도착했을 때, 복수를 끝낸 이들의 기분은 통쾌했을까? 수많은 복수를 다룬 영화들의 엔딩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면 <피에타>에서 죽음을 맞은 두 주인공들은 오히려 평화롭다. 미선이 강도를 이해한 뒤 죽은 아들의 시선 옆에 누워 있을 때의 표정은 모든 번뇌를 내려놓은 듯 하다. 물론 엄청난 내적 갈등 후에 그렇게 용서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런 것을 보면,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일리 있는 말인 것 같다. 증오와 복수를 내려놓을 때,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극한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복수는 결코 통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 미운 놈 떡 하나 주던 엄마의 생각은 옳았다.
 

글/사진 안수진 기자
luckysujin@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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