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정원 어디로 갔을까

④ 영화 <오래된 정원> 실제배경 전주 은석골을 가다

   캠퍼스 곳곳에 은행이 잔뜩 떨어져 있는 것을 보니 이제 정말 완연한 가을이다. 하늘이 제법 높아졌고 환절기를 못 이겨 감기에 걸린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이제 중간고사를 치를 테고 곧 차가운 공기에 코끝이 시릴 것이다. 가을에는 유독 우울해지는 사람이 많아진다. 가을을 심하게 타는 어떤 사람은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가을만 되면 어딘가를 붙잡고 울고 싶어질 때가 종종 있다. 가을에 눈물샘을 자극하는 노래며 영화가 많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인 듯 싶다. 셀 수도 없을 만큼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들이 이때만큼은 진부하지 않다.
   극한 상황의 사랑은 언제나 슬프다. 시한부 선고를 받아 죽음을 전제로 한 사랑이나, 한창 좋을 때 전쟁터로 끌려가는 사랑이 그렇다. 이런 내용의 영화들은 차고 넘치지만, 결말이 뻔히 보여도 모르는 척 끝까지 눈물 흘리며 보게 된다. 남녀가 헤어지는 장면에 덩달아 애가 타고 손에 땀이 흥건하다. 멜로 영화에는 일시정지를 누를 수 없는 힘이 있다. 소리치고 흐느끼는 두 남녀의 눈물에는 그런 호소력이 있다.
   영화 <오래된 정원> 또한 행복이 허락되지 않은 어느 남녀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다른 멜로 영화처럼 울고불고 하지 않는다. 이미 알 것 다 아는 어른들의 점잖고 담담한 사랑 같다. 이들은 몰래 울고 숨죽여 운다. 그래서 보는 사람이 더 숨 막히는 영화다. 영화 속 현우(지진희)는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에 온 젊음을 바쳐 반항하다 결국 경찰에 잡혀 17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영화는 17년 만에 세상의 빛과 만난 현우에게 “들었니? 한 선생, 죽었다더라”라고 말을 건네며 시작한다. 배경은 격동의 80년대지만, 영화는 평생 동안 두 사람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여기저기 쫓겨 다니는 현우를 은희(염정아)가 숨겨주면서 둘은 만났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 현우를 은희는 잡지 못해 헤어졌다. 

주인공들이 숨어 지낸 집

   영화를 찍을 당시 알맞은 장소를 찾는 데만 1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 찾아낸 곳이 바로 전주 은석골이다. 세상과 동떨어져 도망친 현우와 은희가 살기 딱 좋은 시골 마을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정취를 찾기 위해 이 곳을 찾아가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전주라서 가깝겠거니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현우와 은희가 살았던 집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만한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면 꽤 높은 산이 나온다. 그냥 야트막한 동산이 아닌 진짜 산이다. 앞에는 영화에서 본대로 저수지에 물이 고요했다. 설상가상으로 주변에 물어볼만한 곳도 없었다. 산을 한번 꼬박 타고 나서야 촬영장소를 찾았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다. 다 쓰러져가는 옛날 집을 발견했다면 정말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다. 왜 이렇게 찾아가기 힘든 곳에서 촬영을 한 건가 싶었지만 이내 납득했다. 경찰에게 쫓기던 신분인 현우를 감추기에 이만한 곳은 없다.
   안타깝게도 둘이 살았던 집은 거의 폐가가 됐다. 잡풀이 우거졌고 들어가는 대문을 막아놔서 집을 구경하려면 개구멍으로 들어가야 한다. 심지어 마당에서는 벌을 키우는지 꿀벌들이 침입자의 곁을 맴돈다. 신기한 것은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는데도 들어가자마자 영화 속 장면들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현우가 술에 취해 바닥을 기며 자신을 비관하던 마당도, 떠나겠다는 현우에게 은희가 화를 내며 밥상을 던지듯 내려놓은 곳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병에 걸린 은희가, 살던 집으로 돌아와 숨이 멈출 때까지 그림을 그리던 장면도 주마등처럼 스친다.

집 앞에 펼쳐진 저수지

   집 앞의 저수지는 우거진 잡풀 사이로 가을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그간의 모든 사연들을 집어 삼킨 듯 깊고 고요하다. 현우와 은희가 울고 웃었던 추억들을 주변의 자연물들이 고루 나눠 가진 것 같다. 산과 물이 모른 척 그들을 둘러싸서 주인공들은 점잖게 슬퍼했나 보다. 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현우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났다. 현우는 뒤늦게 만난 딸에게 “그땐 가만 있으면 나쁜 놈이 되는 시대였거든”이라고 말한다. 그제서야 주인공들이 슬픈 내색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했다. 시대가 대신 울어주고 있어서, 그들이 울 틈이 없었던 것이다.
   가을에 왈칵 감정이 북받친다면 영화 <오래된 정원>을 추천한다. 지지고 볶고 눈물 쏙 빼는 멜로영화에 지쳤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차오르는 눈물을 꿀꺽 삼키는 주인공들에겐 지금껏 겪지 못한 강한 힘이 있었다.
 

글/사진 안수진 기자
luckysujin@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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