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선 본질은 독재연장 사기극

  지난 19일 전국 수만여명의 학생, 시민들의 반민자시위와 함께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한 '민자당 전당대회'가 이종찬 후보의 경선거부로 인해 의도했던 '축제분위기'가 아닌 맥빠진 반쪽대회로 치러졌다.
  1990년 1월22일 국민의 의지로 이루어진 여소야대의 국회를 하루아침에 여대야소만들어버린후 사기와 기민, 비리, 폭력등 반민주적 폭압통치로 일관했고 물가, 주택, 교통, 환경, 교육, 범죄, 언론 심지어 마시는 수돗물까지 국민들의 생활구석구석을 좀먹고 미국의 경제침략에 무릎꿇어 시장을 전면 개방해주고, 제2의 을사조약이라 불리는 전시접수국지원협정까지 체결해 줌으로써 군사적 주권마저 내주어 버리고 이 땅을 통일을 위해 남북 7천만 겨레가 합의한 남북합의서를 성실히 이행하기는 커녕 통일문제를 오로지 정권연장에 악용하기에 급급하였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장본인이 바로 민자당 정권이다.
  군부재자투표부정 안기부 기무사의 흑색선전등 온갖 부정선거에도 3ㆍ24총선에서 보여진 국민들의 의지는 민자당 정권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었다. 이러한 국민의 의지를 무마시켜버리기 위해 '평화적인 민간정부로의 이양'이라는 미명아래 자유경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4천만 민중의 모든 관심을 민자당내 대권주자가 김영삼이냐 이종찬이냐 하는 대권경쟁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자유경선의 본질은 허울좋은 명분이었으며 이미 권력승계에 관한 묵계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사기극일 뿐이다.
  5월의 달력에는 무려 31명에 달하는 열사들의 기일이 적혀있다. 여기에 수천여명의 광주영량까지 더하게 될 때 어느날이고 피의 냄새가 가실날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5월은 살아있는 자들의 게으름을 부끄럽게 만든다. 이제 계기가 없음을 한탄해 하지말고 민자당에게서 멀어져가는 민심을 이끌고 92.93년 민주정부수립을 이해 3천리 방방곡곡을 우리의 함성과 발자욱으로 덮어버리자.

  <이경(무역ㆍ4)>

  타이 유혈사태
  광주항쟁 떠올려

  지난 17일, 타이 수도 방콕에서 시위진압에 투입된 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하여 평화적 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졌다.
  잠통 스리무앙 전 방콕시장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는 정부가 11일에 여야 합의로 개헌합의를 한 것을 부인하고 개헌이 된다고 하여도 수친다수상의 4년 임기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함으로써 야당이 요구한 수친다수상의 사임을 거부한 것에 대해 항의시위를 했고 군은 시위대에게 발포한 것이다. 이군의 발포로 약100여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타이의 유혈사태를 보면서, 나는 1980년 5월18일 광주를 생각했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 '군부독재타도' '민주정부수립'을 외치는 광주시민에게 군은 공수부대를 투입했고 공수부대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와 살상용곤봉, 그리고 군화발로 진압했다.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해서 대항했다. 그리고 12년이 흘렀다.
  그러나, 12년이 지난 지금, 광주항쟁의 의의와 진상규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89년 2월말 광주청문회는 '군의 과잉진압과 시위대의 폭력적 대응은 둘다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광주는 '화해와 보상'으로 덮여졌다. 그 당시 핵시 사안이였던 '발포명령자와 미국의 개입'은 밝혀내지 못하고 청문회 스타만을 만들어 놓은 채 미완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선거때만 되면 나오는 '광주 항쟁 진상규명'이라는 공약이 사라지고 5월말되면 광주가 '반정부 시위현장'으로 변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5월 광주의 후유증은 심각하다. 2백78명의 영령들, 20여명의 정신이상자, 1천9백16명의 부상자들. 쓰러져간 영령들에 명예회복과 살아있는 사람들의 배상은 마무리 되지 않고 있고, 오히려 가해자들은 버젓이 활개치며 다니고 있으니 차으로 모순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타이의 유혈사태를 보면서 다시 한번 5월 광주를 되새겨 본다. 광주는 살아 있고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박치정(공법ㆍ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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