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삶의 주인으로 서고자하는 언론본래의미 찾아야

  충대신문의 역사 그리고 대학신문 자주화 운동

  언론의 역할을 흔히 '자기정화'라 한다. 치부를 드러내더라도 시시비비를 가려 진실을 찾아냄으로써 찌꺼기를 걸려 사회의 정화작용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자로부터 주어진 언론의 힘이 사적 소유되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곡필이라 한다.
  38년의 역사, 지령700호, 5권의 축쇄판, 수많은 신문묶음들이 주는 중압감은 하나의 흐름을 추스리는데 어려움을 준다. 대학신문은 기자들의 사회진보에 대한 노력과 실험정신으로 만들어진다. 그 과정은 때로는 수업을 빼면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식사도 제대로 못한채-과정과정속의 모습은 치열함일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역사를 정리하려는 길목에서 그 치열함에 근접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만난다. 두껍고 무거운 신문뭉치들에 쌓여진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그들이 만들려고 했던 신문은 어떤 것이었을까.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신문은 신문일뿐 역사가 왜 필요하냐고. E.H.카아가 말했듯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 이다. 지금의 대학신문의 호름들은 끊임 없이 과거와 대화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흐름속에서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듯 대학신문, 우리신문의 흐름속에서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듯 대학신문, 우리신문의 흐름속에서 역동성을 가진 운동의 과정인 지금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사회라는 특수성에 기초한 대학신문은 대학이 사회와 괴리된 상아탑이 아니기에 우리신문 또한 그속에서 규정받아왔으며 사회발전의 과정속에서 학원의 상황속에서 신문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폭압의 세월 속에서 민주화의 도도한 물줄기를 따라온 지금, 현실태는 어떠한가에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신문의 위치 그리고 역할, 지금을 규명하려는 작업에서 출발한다.

  충대신문의 태동기(54-62)

  내전에서 국제전이 되었던 한국전쟁은 우리민족에게는 잿더미뿐인 폐허들, 분단의 아픔을 남겼다. 50년대는 이러한 좌우익의 대립속에서 대학은 정치참여를 배제당하고 반북, 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했었다.
  52년문화동 보문산 기슭에 전시연합대학의 성격을 가지고 출발했던 우리학교는 대학의 면모와 내용을 갖기 위해 노력했고 이런 상황속에서 54년 충대신문의 모태인 문리대학보가 창간되었다. 이어 59년 충남대 학보가 '대학의 면학분위기 심화를 위한 여론조성'과 '대학인의 자질향상과 연대강화'를 목적으로 하며 창간되었다.
  그당시 신문은 학교의 제반여건들이 미비했으므로 시설확충이나 학사운영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충실히 자라는 문리대(6호 59년 12월15일자), 공대특집(8호 60년 2월9일자)등이 시리즈로 들어가 연혁과 소개, 시설등을 설명해주는 기사들이 실렸다. 하지만 3ㆍ15부정선거를 계기로 터져나온 4ㆍ19혁명시기에는 4ㆍ19관계기사 '4ㆍ19혁명의 여운'(60년 4월), '4ㆍ19혁명은 민족혁명이다'(61년 4월20일자)등이 실리며 민주화의 열기를 보여주지만 곧이어 일어난 5ㆍ16군사쿠데타에 의해 좌절하게 된다. 그후 계속적으로 '5ㆍ16군사혁명의 의의'(61년 6월1일자), '검소한 생활로 혁명과업 완수하자'(61년 6월10일). ' 혁명정신으로-청신한 기품을 수립'(61년 6월 20일)등이 실리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속에서 우리신문은 학술적인 내용의 논문이 내용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지령 50호에는 '학생위주의 편집되어야한다'는 독자의 소감이 실리기도 하였다.
  신문사 내적으로는 소규모의 인원이 인쇄소도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제작하기에 급급하였고 신문이 지향하는 뚜렷한 목표가 있지는 않았었다.

  정립기와 모색기(63-79)

  제3공화국이 들어서고 '선건설 후통일'이라는 방침이 정해졌다. 박정희 정권은 성장우선정책에 '통일'이라는 과제는 유보되었고 통일자체가 '건설'에 방해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건설'이 이룩해가는 경제구조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자립경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회상황은 50년대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편 청주의 농대까지 포괄했던 충청대학보가 다시 충남대학보로 환원되면서 주간에서 순간이 된다. 학교 또한 충북대와의 분리로 안정적인 구조를 잡아가는 가운데 충대신문도 충남대학보로서 이후부터 발행이나 체계면에서 안정적인 구조를 이룬다.
  60년대 중반까지도 대외적인 문제보다는 학내문제에 치중했고 논문이나 문예원고들이 착실히 들어갔다. 박정희 정권의 성장논리에 맞는 논문들 '70년대 한국의 좌표'(71년 1월1일자), '70년대를 향한 한국경제의 좌보'(71년 3월21일자)이 실렸다. 또한 71년을 학풍조성의 해'(71년 1월1일자)라는 기사가 실렸으며 뒤를 이어 '학풍쇄신을 위한 제언'이라는 시리즈가 게재되었다. 그 다시 학생과장이던 정동선교수의 '불량학생 선도의 길'(71년 6월21일자)이라는 기사를 읽고 학부 학생이 '학생의 현실참여는 왜 불량시되는가?(71년 6월 29일자)라는 골을 투고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야기되던 사제간의 윤리와 학풍이란 '사랑의 스승과 따르는 제자가 되라'(69년 1월1일)는 입장에 다른 것이었다. 학내의 사건을 보도하는데에 있어서도 제한된 입장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갈등구조 속에 놓여있었다.
  수출입국이라는 환상속에서 저임금, 장시간노동의 착취를 의미하는 72년 유신체제의 폭압아래서 학원 또는 각종 탄압의 대상이었으며 그즈음 우리신문에는 '10월유신과 우리의 자세'(72년 12월4일)이라는 글이 실렸다. 하지만 역사의 진보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아 학생들이 학원주체로 서고자하는 움직임들이 일었으며 '대학의 자율은 선거로부터'(73년 6월11일). '새학기, 각 써클움직임 활발'(74년 9월9일자)라는 글이 실리는 등 총학생회의 부활과 함께 자치가구의 활발한 활동들을 벌여나갔다.
  역사의 흐름과 함께 역사에 대한 인식의 깊이와 의식이 성장되어감과 맥을 맞추어 한국사회에서의 대학인의 사명과 역할을 모색하려는 대학의 고민이 보였으나 유신체제의 억압속에서 싹이 잘린 상황이었다. 일반 언론에 대한 엄격한 통제조처에 대해 혹자가 표현하듯 암흑기였다.

  정착과 발전기(80-88)

  분단이후 해결되지 않은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표출되었고 독재연장은 대량 양민학살 위에서 이루어졌다. 10.26으로 형성된 민주화의 흐름은 10월27일 선포된 비상계업하에서 유신의 재건이 준비되어 있었다. 12.12쿠데타로 인한 안개정국 속에서 민주화의 봄바람은 학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학교에서 70년대 말은 교내시위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80년의 봄, 개강 후 민주화의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어 물밀듯이 일어섰고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교외진출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5월1일 문화동 캠퍼스운동장에서 학생총회를 하다가 그당시 총학생회장이던 오원진씨가 연행되기도 하였다. 5월17일에 학교가 휴교가 된다. 그후로는 병영집채훈련이 이루어지고 그때 삼청교육대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교내에는 경찰이 주둔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교내시위조차 상상도 할 수 없었다.
  5.17때는 '무릎꿇고 사드니 차라리 서서 죽길 원하노라'(80년 5월12일자)라는 글이 실릴 예정이었으나 배포를 하지 못하는 수난의 시기였다. 계엄이 풀릴 때까지 도청에서의 군인의 검열을 받아야만 했고 그어지는 검열의 붉은 줄은 절대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사회의식은 전혀 반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82년 '공업교육대 방역특례'문제로 교내시위가 일어났으며 이에 공대에서는 시험거부를 하는등의 집단행동을 했으나 학교측과의 마찰로 기사화시킬 수 없기도 했다. 학교측의 의도가 거의 반영되는 신문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84년 학원자율화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그동안 금기시되어왔던 분야에 많은 지면을 할애, 조국통일과 민주화를 향한 내용이 속속 발표된다.
  우리신문에서 살펴보면 '대학자율논의'(84년 3월26일, 4월 16일), '학생처장과 자율논의 가져'(84년 4월30일),'학원자율의 현주소는'(85년 1월14일)등의 기사가 실렸으며 그후로 '80년대 문학운동의 방향'(84년 10월8일),'민주주의 문제와 그 해결방안'(84년 1월14일), '중공 과연 맑시즘을 포기한 것인가?'(")'오늘의 한국 무엇이 문제인가'(84년 2월22일), '한국사회변동방향과 통일지향을 위한 소고'(")등의 사회적인 사안을 다룬 기사가 나타난다. 이러한 흐름의 주요동력으로 작용한 것 중의 하나가 학생운동의 사상, 이론과 실천의 혁신이었다.
  대학신문기자들의 모임조차 제한하는 상황이었다. 80년초 3개학교의 대학신문기자가 모여 친선체육대회를 가졌는데 체육대회가 끝나고 편집장이 해임되는등 웃지못할 일까지 벌어졌었다. 대학신문기자들도 점차 이러한 소모임에서 벗어나 조직적 정비를 하게 된다. 87년 11월 29일 전국적 연대조직인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의 결성식이 있었고 대학신문 현장을 제정 공포하기도 했다.

  매체혁신기와 현재(89-)

  87년을 거치면서 성장한 대중의 의식을 사회적 문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이에 편승 사회과학서적 붐과 각 자치기구의 매체가 등장한다. 갑자기 풀려진 정보와 자유는 그동안 금기시되어오던 것을 전면적으로 싣게 했다.
  그당시에는 대부분이 진보적인 이론을 다룬 논문형태의 글이 많이 실렸다. '암울한 고뇌의 역사를 뒤흔든 민중의 투쟁!'(87년 9월 7일자), '민주발전과 군의 정치적 중립'(87년 9월14일자),'정신의 독립, 민족정기의 정립이 우선','학원민주로 가는 길','민중언론에 나타난 언론관'(87년 10월12일자)등 모순이 많았던 시기, 고찰해야할 과제들이 많았던 탓 그리고 그 동안 제한되어왔던 정보의 반작용적 측면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86년 건대항쟁이후 학생운동진영에서 편향된 운동방식에 대해 자기반성과 함께 대중노선을 제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대학신문내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났다. 그러한 노력의 가시적인 결과로는 기간의 진보적인 이론소개에 관심을 두었던 편집방향에 대한 재평가를 하며 제기된 '매체혁신운동'이었다. 대학신문의 매체혁신운동이란 주체혁신, 지면혁신, 조직혁신 3대혁신을 포괄한 것으로 지면혁신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조화'라고 하는 불분명한 명제에서 대중과 괴리되었던 편집노선을 지양하고 대중적인 언론의 지반을 확보하는데 중심을 맞추었다. 조직혁신은 대학언론사의 봉건주의적인 관료성과 폐쇄성을 타파하고 독자를 신문의 주인주체로 내세우는 대중성 확보를 중심으로 한다.
  매체혁신은 대학신문의 발전단계에서 하나의 발전단계로써 존재했다. 이러한 일련의 맥락은 사회진보와 궤를 같이한다. 4.19혁명으로 잠시동안 존재했던 민주화의 열기, 80년 봄의 상황, 폭압적인 독재의 시대를 뚫고 민주화를 쟁취해냈던 87년6월항쟁- 지금 비록 그 의미가 굴절되었을지라도-속에서 꾸준히 성장한 대중의식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대학신문의 위상, 역할들을 인지해낸 그 당시 사람들의 노력, 투쟁의 산물이었고 또한 그 당시의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기도 했다.
  매체혁신을 그후로 뚜렷한 성과를 냄없이 지면에 대한 고민에 머물렀다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사람과 신문사체계에 대한 고민들을 진행시켰다.
 
  잃어버린 지향을 찾아

  신문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우리사회의 현대사를 쉽게 마주할 수 있었다. 대학신문의 역사는 질곡의 역사속에서 굽이쳐온 일시적인 좌절, 대립, 투쟁의 역사였다. 저항하기 위해, 잊기위해 술취해야 했던 지난 날의 일시적인 좌절들이 역사의 원동력이 되고 마침내는 그릇된 것 위에 우뚝서는 그날은 반드시 존재했다.
  역사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각성된 대중들에 의해 움직여진다. 매체또한 마찬가지로 그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성격이 결정되며 움직여진다.
  대학신문은 독재정권의 임기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독재정권의 것도 아니었으며 결국은 독자들이 주인이었기에 질곡의 역사속에서도 대립하고 투쟁할 수 있었다.
  언론행위는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이으로 살고자하는 본성으로 생겨났다. 그렇기에 지금은 왜곡되어 있지만 언론본래의 의미속에서 현재의 모습또한 독자들이 삶의 주체로서 환경을 판단할 수 있게 해야한다. 언론의 생산과 소유의 주인이 독자대중이어야 하며 그러한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독자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옹호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어떠한 힘도 그위에 설 수 없으며 또한 그리해서도 안됨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신문 안에서 대학사회의 구성원인 교수ㆍ학생ㆍ교직원이 학원민주화의 길에 하나로 만나야 한다. 어렵지 않게 접하는 주간교수와 학생기자들의 편집권갈등도 이러한 원칙하에 풀어져야 할 것이다.
  대학신문은 속보성에서 대자보를 따라잡을 수 없고 사회가 전문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문제의 심층분석에 관해서는 전문서적을 따를 수 없고 문화나 각종 이론또한 전문서적을 따라잡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동안의 편집의 틀을 깨는 실험정신으로써 독자적인 영역의 발굴이 요구되며 주체들의 노력과 독자의 관심이 좋은 신문을 만들 수 있는 동력이 됨을 알게된다.

  <편집장 김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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