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친여적 성향 규제위한 형식적 명분

  근본적인 해결책 절실

  대학신문의 편집권을 둘러 싼 갈등이 대학의 연례행사가 되고 있다. 올해 학기초만 하더라도 제작이 중단되는 등의 갈등을 빚은 대학신문은 전국적으로 20여개에 이르렀으며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와 유사한 마찰을 빚은 대학신문은 거의 모든 대학에 다 해당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대학신문의 편집된 갈등엔 교육부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고 있지만 갈등의 직접적인 당사자들은 대부분 수와 학생들이라고 하는 점에서 이는 이만저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갈등 자체도 곤혹스러운 것이지만 그로 인해 낭비될 당사자들의 물적ㆍ심적 에너지와 제작중단으로 인한 전체 학생들의 불이익을 감안컨데, 대학신문의 편집권 갈등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느끼고 있듯이, 유감스럽게도 현 단계에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존재하지않는다. 그건 학생들의 시위를 근절시킬 근본적인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학생들의 시위를 근절시킬 근본적인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의 대학은 사회의 요청에 의해 너무도 학교 밖 정치와 살을 섞어 왔다. 대학의 사회참여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오늘날 이 만큼의 민주화나 대학생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이젠 학생들이 변화된 상황에 따라 똑같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대학신문 '편집권 갈등'사례

  그러나 한국사회의 변화의 정도를 보는 시각에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대학과 학생들의 역할을 둘러 싼 갈등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정말 골치아픈 일이다. 그렇다고 대학신문이 아주 평화롭게 철두철미한 대학당국의 홍보지도 전략했던 5공시절을 차라리 그리워해야 하나? 절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누구든 바로 이점을 인식한다면 갈등의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먼저 대학신문의 편집권 갈등의 사례들을 몇개 살펴 보고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고대신문'에서는 1월17일 주간교수가 평점 평균 3.0이하의 학생기자 5명(편집국장, 취재부장 포함)을 해임하고, 중견 언론인을 부주간 (편집국장 역할)대학원생을 부장으로 영입하는 등의 체제개선안을 내놓음으로써 학생기자들과 의견이 맞서 신년호부터 발행이 중지됐다. 이 사태는 주간 교수가 학생기자 요구안을 수용함으로써 타결돼 발행중단 5개월만에 속간하게 되었다.
  '연세춘추'는 정세영 현대그룹 회장이 공학관신측을 위해 30억원을 기증한 것과 보직교수 발령을 1면 머릿기사와 사이드기사로 보도하고, 수습기자 자격을 2학년이상 학점평점 2.5이상으로 할 것등 학교측의 요구에 학생기자들이 반발, 3월2일자 개강호가 나오지 못했다.
  3월5일 배포예정이었던 '서강학보'는 학교측의 재야쪽에 편향된 시각을 지닌 외부 필진의 글을 줄이고 92년 전체, 단과대 수석합격자 인터뷰기사를 3면에 걸쳐 게재할 것을 요구하고 학생기자들이 이에 반발함에 따라 발행이 중단됐다.
  전남대 학보인 '전대신문'은 새학기 들어 첫 발간된 3월3일자부터 다섯번의 신문을 외부광고 없이 학내의견이나 기획광고로 채워오다 4월7일자에 실릴 예정이던, 건전광고운동을 주장한 "돈에 팔릴수 없는 지면'이라는 제목의 학생컬럼이 문제가 돼 학교쪽에 의해 제작이 중지되는 사태를 빚었다.

  학교홍보요구 뒤에 숨은 뜻

  이상 몇개의 사례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건, '편집권갈등'이라는 표현은 대단한 완곡어법이라는 점이다. 대학신문이 대학당국의 홍보지로 전락했을때에 편집권 논쟁이 있었는가? 물론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누가 편집권을 행사하든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한 일이었겠는가.
  대학당국이 대학신문에 학교홍보를 요구하는것도 사실상 숨은 뜻은 다른데에 있다고 생각된다. 정말 학교홍보를 하고 싶으면 제도권 언론을 이용하는게 천배 만배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학생들도 대학신문은 안봐도 영향력있는 일간지는 다보고 있다지 않은가 말이다. 실제로 그 어느대학을 막론하고 제도권언론을 대상으로 한 홍보기능이 대단히 발달되었다. 그런데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대학신문의 지면을 차지하겠다고 안달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교육부와 대학당국은 '편집권'이라는 형식적인 명분으로 점잖게 시비를 걸어 대학신문의 비(非)친여적 성향을 규제하겠다는 것이다. 고려대의 주간교수는 총장에게 제출한 개혁안에서 '사회변혁을 위한 선전 선동'이라는 잘못된 언론관을 대학 신문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이 지적은 옳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많은 대학신문들이 그런 언론관을 갖고 있다는 걸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대학신문을 규제해야 한다는 잘못된 발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제도권 언론은 '이윤극대화를 위한 오락주의'라는 잘못된 언론관을 갖고있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권 언론의 내용을 규제할 수 있는 것일까? 교육부와 대학당국이 학생들의 '사회변혁'에 대응해 지키고자 하는 자유민주주의체제라고 하는게 도대체 무엇인가? 그건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어론의 대명사로 통하는 미국의 '뉴욕타임즈'지의 정의에 따르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는한 인종차별주의와 심지어 살상마저 선전선도할 수 있는 언어행위상의 자유조차 보장해주는 제도가 아닌가 말이다.
  대학신문이 추구한다고 하는 '사회변혁'도 사실상 따지고 보면 대부분 교육부나 대학당국이 진정 두려워하는건 케케묵은 마르크스나 레닌의 주의ㆍ주창이 대학신문을 장식하는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올바로 실천하지 못하는 정권의 비리를 문제삼는 것이 아닐까?
   
  '강압'아닌 '대학내 기능'으로

  대학신문은 한국에 자유민주주의가 실천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알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나는 대학신문이 사회변혁을 위한 조잡한 선전선동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건 대학내의 '시장기능'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야지 교육부나 학교당국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절대 안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가 치루어야할 비용이다. 볼테르인가 하는 프랑스사람은 이미 2백수십년전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지만 네가 그것을 말할 권리는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

  강준만<전북대ㆍ신방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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