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영광의 역사 딛고 굳건히 일어서라

  나의 20대를 사람들은 80년대라고 한다. 이제 90년대로 넘어가는 그 경계에 내 나이 서른이 놓여있다. 그리고 보면 내 나이 서른의 의미는 나 개인의 도덕적 태도만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시대가 달라지고 있는데, 나는 너무 많은 시대를 산다. 나는 식민지 반봉건사회에서 태어나서, 제3세계적 개발독재 사회에서 교육받고, 예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젊은 날을 보냈으며, 이제 포스트 모던 사회로 이민가고 있다. 나는 혼란스럽다. 나는 되돌아 보고 싶은데 뒤돌아 볼 틈도 없다. 나는 나의 뒤가 불안하다. 그리고 나의 앞길은 너무 공포스럽다. 나는 전율한다.
  (주인석, <희극적인, 너무나 희극적인>서문중에서)

  1. 들어가며
 

  80년대는, 아니 80년대의 20대는 그 시대의 암울함 만큼이나 짓눌린 심장의 박동을 떠올리게 하는 세대였다. 그들은 짓눌린 암흑속에서 몸부림쳤고, 날개를 퍼덕였으나, 그 연하고 푸른 날개는 광포한 폭력에 꺾여 끝내 땅에 떨어졌다. 이제 그 20대들이 지금 서른의 나이로 90년대를 바라보고 서있다. 그때의 몸부림은, 외침은, 날개짓은 90년대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선 지금 무슨 의미가 되었을까. 그토록 극적이었으며 영웅적이었던 투쟁이란. 다만 90년대를 공포로 전율해야 하는 서른살이 한때 뿌려야했던 눈물 한자락뿐이었을까?
  지금 서른의 눈동자는 풀려있다. 시선은 무작정한 허공을 향하고 있으며, 존재는 표류하고 있다. 어느 한군데에 모여 정박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 젊은날의 사랑은 팔려가거나 강간당했으며, 부풀었던 꿈은 삶의 무게에 지쳐 불투명한 미래를 암담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뿐이다. 그토록 오랜세월을 지나왔던 긴 어둠의 터널의 끝은 아직 보이지도 않는다.
  80년대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20대를 되돌아 본다. 그러나 뒤돌아 보기가 두렵다. 그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기 때문에.
  2. 암흑속에 솟아오르는 투쟁의 함성(80년대 전반기: 1982~1986 지령 501호~600호)

  80년대 남한의 역사는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과 여기에 맞서는 민중의 빛나는 투쟁사였다. 권력에의 욕망은 광포한 폭력을 불러 백주에 대대적인 학살마저 감행하게했고, 그 후 당연히 이어지는 것은 강압적인 침묵이었다.
  그것은 학살당한 민주주의의 석은 시체였고, 이따금 머리가 깨진채 피묻은 옷자락으로 끌려가는 외마디 외침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음침한 술집으로 그들의 거처를 옮긴지 오래였다. 간혹 술잔에서 살해당한 민주주의가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일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알코올에 마비된 민주주의였고, 거기에서는 구역질해낸 위액의 썩은 냄새만 날 뿐이었다.
  취해 비틀거리는 80년대가 계속되고 있다.
  (1)1982년: 신냉전의 막바지

  국제정세는 레이거노믹스로 요약되는 극우보수주의자와 레이건의 패권주의와, 브레즈네프의 소련등 사회주의권과 이념대립이 극도로 첨예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른바 핑퐁외교에서 비롯된 데랑트 무드는 미국의 그라나다 침공, 소련군의 아프간 진군으로 다시 악화되었고, 이른바 신냉전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었다. 아울러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이같은 정세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특유의 철권통치를 훌륭하게 수행해나갔다.
  당시 학내문제로는 제적생 3명을 포하한 46명이 학사징계를 받은 공교대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법률이 보장하는 공교대생들의 군복무 기간을 일방적으로 변경시키고 교사 발령에 문제가 생김으로써 발생된 이 시위는 '7.1 학내소요 관련'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부제가 불은 짤막한 기사로 '소요(!)'사실을 알렸고, 공교대의 역사는 다른 특집기사로 지나갔다. 대규모 학사징계가 따른 시위치고는 허무할 정도로 사건의 내막이나 경위에 대한 보도는 철저히 봉쇄된 것이다. 만화나 만평마저도 당시 있었던 일본 교과서 왜곡사건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것으로 지나가야만 했던 강압적 분위기가 강요되고 있었다.

  (2)1983년: 고르바초프등장

  83년은 그 나름의 역사적인 해였다. 그것은 브레즈네프가 사망하고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국제정세의 흐름에 급격한 변화를 예고한 것이다. 또한 미 CIA의 저강도 전쟁의 희생물이 아니었느냐는 의혹을 이르켰던, 소련 공군기에 의한 KAL기 격추사건으로 국내의 정세는 극도로 위축된 한해이기도 했다. 여전히 충대신문은 우회적인 언어로 이러한 분위기를 풍자하고 있었다.학내에 상주하고 있는 사복경찰을 비난하였고, 철권정치를 혐오하였으며, KAL기 격추를 풍자하였다. 그 참담하기 짝이 없었던 우회적인 언어. 언론은 숨막힐 듯한 고역을 감내하고 있었다.

  (3)1984년: 자율화 시대의 도래(?)

  당시 권의혁 문교부장관이 주재한 전국 총학장회의에서는 5.17이후 학원사태 관련 제적생 1천3백63명에 대한 복교를 결정하였으며, 충남대는 모두 32명이 그 대상자로 파악되었다. 아울러 당시 숱한 조직사건이 뿌리가 되었고, 반인간적인 밀실고문의 상징적 대상이 있던 지하서클에 대한 조건부 양성화 방침도 발표되었으니 실제적으로는 실현불가능한 것이었다.
  아무튼 모두 15명의 제적생이 84년 신학기에 재입학하였고, 학원상주 경찰도 철수하였다. 졸업정원제도 폐지되었으며, 학원에 다시 봄이 오는듯 했다. 그러나 2.12총선에서 패배한 민정당이 주도하는 정국은 곧바로 경색되었다.

  (4)1985년: 총학생회 부활

  80년 봄, 잠시 햇빛을 보았던 학생자치기구가 전두환정권의 총칼에 짓밟힌뒤 실로 5년만에 맞이하는 부활의 순간이었다. 학생자치기구의 부활은 그대로 학생운동의 빛나는 투쟁의 성과였으며 승리의 상징이었다. 이에따라 충남대에서는 자치기구 건설을 위한 학생들의 준비기구를 구성하였고, 직접선거를 통해 각학과 학회장및 단대학생회장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4월부터는 제16대 총학생회 구성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총학생회 건설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10명의 후보가 입후보한 가운데 6월4일 전체득표율 1/3을 차지한 김용덕(당시 경제ㆍ4)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역사적인 16대 총학생회는 부활된 것이다.
  같은시기 서울 미문화원에는 전학련 산하 삼민투가 주도한 미문화원 점거농성이 있었는데, 5월 광주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책이믈 미국에 물음으로써 미국-군부정권의 관계를 전국민에게 폭로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계속되는 전국 각 대학의 시위에 군부정권은 이른바 학원안정법을 국회에 상정, 투쟁의 맥을 끊으려 했으나, 학생운동의 투쟁열은 식을 줄을 모르고 타오르기만 했다.
  그리고 제9대 서명원 총장이 정년퇴임하고 공업교육대학 건축공학과 이창갑 교수가 제10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바야흐로 학원의 민주화운동은 전국민적 민주화 항쟁으로 서서히 전환을 준비하고 있었다.
  
  (5)1986년: 급격히 고양되는 학생운동

  구속-석방이 이어지는 한해였다. 민주주의를 선언하는 투쟁이 캠퍼스를 가득 메웠고, 이제 서서히 전국민에게 민주주의를 선언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학내시위는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기기 시작했고, 시내에서는 기습적인 가두시위가 감행되곤 했다. 아울러 학생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성숙되어감으로써 내부의 사상투쟁과 노선경쟁도 심화되어 갔다. 민족해방그룹과 민중민주주의 그룹은 각기 타당한 이론적 대안으로 그 나름의 싸움을 준비하였고, 지난한 싸움은 10월의 건국대 연합시위에서 정점을 이루기도 했다.
  학생운동의 급격한 양적 질적 성장에 따라 탄압의 물리력 또한 강고해졌다. 이제 목숨을 건, 피를 흘리는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분신자가 속출하기 시작했고, 경찰의 참혹한 물리적 폭력에 의해 평생 불구로 살아야하는 중상자도 생겨났다. 역사는 민족사의 가장 처참한 부분을 꽃다운 20대에게 안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총학생회 차원의 대대적인 농촌활동이 보편화되었고, 노동자ㆍ농민과 학생사이의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다. 하계 농촌활동은 학교당국의 농활저지방침에도 불구하고 의료 5개 팀, 기술 10개팀을 포함하여 충남북 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3.87년 전민항쟁과 표류하는 민주화. (80년대 후반기: 1987~1990년, 지령 601~680호)

  새해가 채 밝기도 전에 정보기관의 짐승같은 고문으로 한 청년이 죽음을 당했다.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의 실체를 드러낸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은 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연장으로 국민의 분노를 증폭시켰으며 마침내 6월항쟁이라는 역사적인 전민항쟁을 촉발시켰다. 거의 20년만에 댙옹령 직접선거가 실시되었고,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평화공세로 세계적으로는 이른바 신데탕트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올림픽이 치루어지고 국내 민주화운동은 노동자의 대대적인 진출과 함께 해방이후 최대의 전선체인 전민련이 결성되었다.
  이제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지나와 바야흐로 최후의 승리를 맞이하려는 순간이다.

  (1)1987년: 고문치사와 6월항쟁

  1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발생한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은 온 국민을 경악에 덜게한 상상을 초월한 만행이었다. 우리는 권력의 광포한 폭력이 자행한 만행에 전율했고, 인간성을 송두리째 버린 권력을 저주했다. 공포로 치를 떨었으며, 분노의 눈물을 뿌렸다. 분노, 허탈, 슬픔이 뒤범벅이 된 대로 1월 27일 충남대생 중앙로 기습가루를 시작으로 전국 가대학에서는 연일 규탄집회를 열었고, 시위는 87년도 전반기내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마침내 6월10일 명동성당시위가 한달 내내 계속되었다. 결국 6.29라는 권력의 항복문서를 받아냈으며, 7월 8월에는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진출을 경외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실로 우리 민중사에 있어 장엄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에서 민주화에 대한 가능성과 그 방법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민중의 위대한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수야당의 기만과 미국과 집권당의 간교한 술책 그리고 내부의 분열은 피눈물로 쟁취한 대통령선거에서의 패배라는 최악의 결과를 빚어 냈으며, 허탈과 허무 분노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않되는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다. 국민들사이에서는 정치에 대한 배반감과 허무감이 만연되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정치적 불신과 냉소로 이어졌다. 그것은 민주화의 동력으로서 민중의 단결된 힘이 상실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다시 대대적인 탄압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엄청난 무게의 무력증과 허탈증세를 안은채 88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2)1988년: 페레스트로이카와 민중진영의 재무장
  
  무력증 증후군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양심수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폭력은 강도를 더해갔다. 청년들의 죽음도 계속되었고, 미국의 영향력은 더욱 커져갔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허탈에 바져 지낼 수만은 없었다. 학생들은 8.15 남ㆍ북 청년학생회담을 추진하여전국적인 통일열기를 불러 일으켰다. 각기 한라산과 백두사네서 출발하여 판문점에서 만나게 되는 일정은 극적인 것이었지만 사상최대의 탄압으로 회담자체는 무산되고 말았다. 세계적 정세는 급격한 화해의 무드였지만 국내정세는 여전히 냉각된 채였다. 페레스토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로 요약되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은 서방과의 관계를 호전시켰고, 세계는 오랜만에 평화의 무드에 들뜨고 있었다. 그러나 긴장된 국내의 정국은 민중진영의 단결된 힘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울러 4.28총선에서의 야당승리는 5공청문회를 열어 5공비리에 대한 선량들의 추궁이 인상적이었던 한해이기도 했다.

  (3)1989년: 잇달은 방북과 통일운동 그리고 전교조 출범
  89년은 민족의 통일운동사에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된 한해였다. 임수경씨가 전대협을 대표하여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였고, 이어 문규현신부, 문익환 목사 등이 잇달아 남북, 통일운동의 열기는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또한 이땅의 당당한 노동자임을 선언한 전교조 결성으로 대량해직이라는 상식밖의 폭력적 탄압을 불러오기도 했다. 또한 새해 벽두에는 전국의 애국적 민주세력이 하나가 되는 그야말로 해방이후 최대의 전선체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결성되어 민중운동진영의 단결을 과시하기도 한 한해였다.
  이제 정국은 민중의 광범한 연합세력대 미국 군부정권의 대결양상으로 분명해졌고 그만큼 정권의 탄압은 폭압적인 양상을 보이게되었다.
  이때 양심수의 수효는 집시법 471명, 형법 407명, 화염병 32명, 국가보안법 284명으로 5공시절 평균치의 2배에 이르렀다.
  학내에서는 이창갑 총장이 퇴임하고 제11대 총장으로 경영학과의 오덕균 교수가 직선으로 선출되어, 사상 2번재의 직선총장이 되기도 했다.
  (4)1990년: 사회주의의 몰락과 한반도

  이념대결의 시대가 가고 있었다. 헝가리와 폴란드를 시작으로 사회주의 시장경제 도입은 그 토대를 광범하게 붕괴시키고 있었다. 민족민주운동진영의 혼란과 지식인들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권력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가속되었으며, 미국의 패권주의는 중동에서의 미사일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암담한 정세에서도 권력과 자본의 끝없는 욕망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이 계속되었다. 현대중공업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으로 대변되는 노동자 투쟁은 한반도의 미래를 밝혀주는 횃불이 되고도 남았다. 사회주의의 몰락에 흔들리는 지식인의 고고한 절망을 비웃으며 노동자들은 전진하고 있었다.
  표류하는 90년대, 이제 방향키를 잡아야할 때이다. 한데 모여 다시 박차고 일어나야 할 때이다.

  4. 나오며

  "우리에게 역사가 있고 그 속에 살아 있음으로 하여 자랑스러워야 한다. 역사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시간의 흐름만이 해결의 열쇠가 아님을 우리는 지난 시대를 통해 보았다. 지난 시간들의 생새한 기억들은 90년대를 맞이한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밑거름이 될 것이다. 지난 80년대는 고난과 영광의 시대였다. 한반도는 엄청난 변화를 10년간 겪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들이 이땅 한반도까지 불어오기에는 너무나 많은 희생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특히 풀어야 할 과제들은 함께 풀지 못한채 또 다시 90년대로 넘겨버린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지나간 역사 위에 새롭게 서야 한다...80년대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안겨주었는가? 모두가 하나됨을 느끼게 한 성취감도 있었지 치떨리는 분노와 좌절감이 더 많았던 날들. 마지막까지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끝맺은 80년대를 돌아보며 우리는 의지를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655호 <7대 뉴스> 편집자주에서)

  이기원<본사 동문3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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