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부문 당선

  침묵이 가득한 세상에서 

 

  띠링-
  조용한 적막 속에 벨이 울린다. 핸드폰을 만지는 나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혹시라도 보일세라 책상 밑에서 빠르게 누른다. 그리고 얼른 닫는다. 얼마 되지 않아 띠링-. 답장이 왔다. 말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메시지가 왔다. 또 다시 책상 밑에서 현란하게 손을 놀린다. 입은 굳게 다문 채,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하고 있다.
  바로 앞에 너의 모습이 있다. 평소에는 아주 친한 너다. 너는 당신의 여자 친구일 수도 있고, 학교 선배일 수도 있고, 혹은 부모님일 수도 있다. 나와 너의 거리는 불과 30cm도 채 되지 않는다. 가깝다면 매우 가까운 거리다. 나의 눈동자 안에는 너의 모든 모습이 포착된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보이는 잔상일 뿐, 이내 눈동자에는 조그마한 핸드폰 액정만 가득 채워진다. 나는 너와 말하지 않는다. 아마 1cm로 밀착되어 있다 한들 나는 너와 말하지 않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너 또한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와 너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와 너는 대화를 하고 있다. 그 대화는 바로 앞에 있는 너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실제로는 본 적이 없는 어느 누군가와 빠르게 이야기한다. 너도 역시 수천 킬로미터에 떨어진 아니, 수억 만 리쯤 되는 누군가와 빠르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와 너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서로 웃고 있다. 감정의 교감이 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나와 너는 핸드폰 액정을 보며 웃는다. 나도 웃고 너도 웃었지만 나는 너의, 너는 나의 표정을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가끔씩은 너가 있었는지도 모를 때가 있다. 나는 이것을 대화라고 부르며, 좀 더 고상하게 의사소통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는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는 사람들로 빽빽하다. 그 빽빽한 사람들의 눈은 온통 핸드폰 앞으로 고정되어 있다. 열심히 두드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바쁘다. 입술은 굳게 닫혀 있다. 지하철이 아니라 버스를 타도 이 광경은 펼쳐져 있다. 이들의 대화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진행된다. 오로지 한 곳에의 집중과 몰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답장이 왔다는 진동음에 촉감으로 반응한다. 뒤이어 또 다시 집중과 몰입을 반복한다. 얼핏 보면 상식을 넘는 기괴하고 때로는 고등적인 대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은 무의미한 말들의 연속이다. 여전히 입과 귀는 닫은 채 우리는 어디에서든 스마트한, 눈과 손이 하는 대화를 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느덧 침묵으로 가득하다. 말할 수 있는 입이 있고 성대가 있고 혓바닥이 있지만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대신에 손가락과 지문만으로 대화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목소리는 잃고 있다. 나는 어떤 목소리인지, 너는 어떤 목소리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들어본 적도 없다. 말할 수 있어도 나는 손가락으로 표현한다. 진화론이 계속 이어진다면 인간의 입은 퇴화될지도 모른다. 반면, 손가락에 입이 달리게 될 수도 있다. 지금처럼 계속 된다면 인류는 수십 개의 손이 달린 입 없는 동물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무미건조한 문자 메시지를 보며 나는 너의 숨결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메시지 속 내용에서 나는 스스로 담겨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너를 느끼기엔 많은 것이 부족하다. 핸드폰을 사이에 두고 조합된 언어를 주고받는 것이 과연 어떠한 감정을 보여줄 수 있을 지 고민이 된다. 나는 늘 그러한 고민 속에서 너라는, 우리라는 존재를 자꾸만 잃어버린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세상은 날로 첨단을 달리고 스마트한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 기술력만큼 인간은 언제나 공허함을 느낀다. 딱딱한 전자 회로에는 인간의 땀과 숨이 들어있지 않는다. 그건 너무나 슬프다. 인간이 만든 물건이지만 결코 인간적일 수 없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놀라운 것은 그 물건이 인간을 전자 회로처럼 만든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인간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낼 필요도 없어졌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목소리를 낼 때마다 나오는 휙-휙- 내쉬는 바람을 들을 수가 없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너임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이제는 알 수가 없다. 알 길도 없다.
  목소리가 사라진 대화는 피상적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다분히 의미 없는 말들의 연속이다. 그 말들 속에서 나와 너의 관계는 옅어질 뿐이다. 잠깐 스쳤다가 이내 가라앉는 것처럼 잠깐 만났다가 이내 멀어진다. 그러한 관계 속에 있어서 현대인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핸드폰에 수많은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한들 늘 고독하게 문자를 보내고 있다. 통화를 누르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너무 어색한 손짓이다. 현대인은 손가락은 익숙해도 혓바닥은 익숙하지 않다.
  목소리는 인간이 내보일 수 있는 친밀감의 하나다. 너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나의 귀에 도달해 고막을 건너 최종적으로 오는 곳은 뇌가 아니다. 과학적으로야 뇌에 도달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심장 어느 한 구석에 도달한다. 반대로 내가 보낸 목소리는 너의 심장으로 도달한다. 심장과 심장이 만나는 사이에서 비로소 끈이 완성될 수 있다. 이 끈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심장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목소리만이 이 끈을 만들고 팽팽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 우리들의 끈은 너무나 가늘고 힘이 없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다.
  침묵이 가득한 세상에서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이렇게 침묵 없이 말하다가는 모든 것이 침묵으로 변해버릴 것만 같다. 사는 것도, 인간이라는 것도, 감정이라는 것도 딱딱하게 굳어버렸을 때,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지. 이제는 대비할 수밖에 없다. 젊은 나이에 그래도 이 세상에서 돌아가는 대화의 메커니즘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옳은 지 그른 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서질 않는다. 인간이 기계를 창조하였지만 기계가 인간을 다시 조립하여 재창조하는 기분이라고 할까. 이따금 너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보다 문자가 오는 진동음에 더 빨리 반응할 때, 이런 대화에 길들여졌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숙이게 된다.
  우리는 디지털이 가져다 준 풍요를 얻은 대신 목소리로 대화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모두의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 대신 핸드폰 액정을 응시하며 침묵을 지킨 채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자화상이랄까. 아니면 외로움의 밀실에 자발적으로 갇힌 죄수들이랄까. 참으로 서글픈 모습들이다.
  세상의 방식을 등지며 나는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핸드폰으로 수천, 수만 가지로 하고 싶은 말을 아끼어 고이 묻어두면서 나만의 방식으로 침묵을 지킨다. 그러다가 전화를 하거나 혹은 만날 때, 아꼈던 말을 풀어낸다. 내가 호흡하고 내쉬면서 나온 말들은 내 체온을 머금고 있다. 무미건조하게 손가락 관절이 눌러낸 문자 메시지는 차갑다. 나의 체온을 담지 못하고 차갑게 식어버릴 뿐이다. 목소리로 전달되는 나의 말들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언어의 기호가 아니다. 나의 모든 것과 따뜻한 체온을 담아낸 상자이며 그 상자 속에는 팽팽한 끈이 담겨 있다. 그 끈을 심장에 잇고 당기는 것은 너의 몫이다.
  어느 날, 문득 핸드폰을 두고 밖에서 너를 향해 말을 거는 내 자신을 보았다. 나는 수십 통의 문자 메시지를 제쳐 두고 조심스럽게 너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역시 나도 길들여진 탓인지 익숙하지 않아서 매우 어색했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떨림이 너에게로 향했다는 것이다. 딱딱하고 차가운 기운이 아닌 심장 가까운 곳에서 차오르는 따뜻한 떨림을. 비록 보잘 것 없는 한 마디였어도 목소리를 타고 너의 심장 가까운 곳으로 닿았다는 사실은 나를 기쁘게 했다. 그 기쁨 속에서 나와 너의 대화는 기계와 같은 적막을 서서히 깨면서 시작할 것이다. 이 침묵이 가득한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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