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301, 302>

  중견의 자리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조로 현상이 두드러진 한국영화의 풍토에서 80년대 중반 한창 때를 보냈던 감독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박철수 필름'이라는 프로덕션을 세우고 그 첫번 영화로 '301, 302'를 만든 박철수 감독은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만한 중견 감독이다.
  아직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유행을 타기 이전인 80년대 중반, '안개 기둥'으로 이혼녀의 홀로서기를 진지하게 그려내어 호평을 받고, 도종환 시인의 동명 시집을 영화화한 '접시꽃 당신'으로 대중적 각광을 받은 바 있는 박철수 감독은 주변의 평가가 어떻든간에 그에 개의치 않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몇 안되는 감독중의 하나이다.
  그는 작년에 중년 남성의 위기감을 성적 정체성의 위기라는 각도에서 조명한 '우리시대의 사랑'을 만들었지만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모두 외면당한 바 있다. 그런 그가 '고전적 서술 방식으로 이야기하기에 한계를 느끼'고 스무살 나이의 영화학도가 쓴 시나리오를 채택하여 영화화한 '301, 302'는 그 특이한 소재로 촬영 이전부터 많은 주목을 끌었다.
  특이한 소재라함은 음식 만들기와 먹이기를 일컬음인데, 한국 영화에서 음식이 주요 모티브로 사용된 것은 아마도 처음이 아닌가 싶다. 감독은 이러한 소재를 활용하여 식욕과 성욕을 등치시키고, 그 안에서 특히 여성의 욕망을 이야기 하려 한다. 물론 '여성의 욕망'이란 말 그 앞에는 '가부장제 사회에서'라는 말을, 그리고 그 뒤에는 '의좌절'을 붙여야 온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새희망 바이오 아파트'301호 여자(송희)와 302호 여자(윤희)사이의 음식 만들어 먹이기와 거부하기를 중심축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곧 욕망하기에 능동적이었으나 좌절당한 여자와 욕망하기 자체를  거부하는 여자간의 갈등과 상호침투의 과정이다. 송희는 음식 만들기, 남편에게 먹이기, 남편의 사랑받기를 욕망했으나 그것이 좌절된 경험을 가진 여자이며 윤희는 정육점을 하는 의붓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던 과거로 인해 욕망하기 자체를 거부하게 된 여자이다.
  이들 간의 관계는 송희가 남편 대신에 새로운 욕망하기의 대상(윤희)을 찾아내면서 시작된다. 윤희로부터 '섹스에 미친 더러운 여자'취급을 받았다고 느낀 송희는 윤희를 자신과 똑같이(뚱뚱하게)만듦으로써 윤희에게 복수하기를 꿈꾼다. 그리하여 그녀의 음식 만들기는 다시 시작된다. 욕망의 성취에서 좌절로 가는 과정을 겪었던 남편과의 관례와는 달리, 윤희와의 관계는 욕망의 좌절에서 상호 소통의 획득이라는 과정을 밟고 마침내 그것은 송희가 윤희를 요리해서 '먹음'(이 영화에서 윤희를 잡아먹는 송희의 행동은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됨'의 상징으로 여겨질 수 있다)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 둘간의 이해와 하나됨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는 자로서의 여성이라는 동일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그 점은 두여자가 과거의 고통을 서로 나눔으로써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면에서 박철수 감독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억압적 상황의 고발이라는 자신의 이전 주제를 억압받는 여성들간의 자매애로까지 발전시키는 진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는 여전히 '구조'가 아닌 '개인의 심성'(윤희의 의붓 아버지, 송희의 전 남편 같은 못된 남성)을 문제삼는 사고가 잔존하고 있으며 이는 더욱이 악역을 그리는 충무로 영화의 악습(과장된 연기와 극적 동기화의 미비)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못된 남성으로 인해 '특수한'과거를 겪은 두 여성의 이상 심리를 그린 드라마쪽으로 기울이게 되는데 그것은 수사관을 등장시켜 실종된 여자(윤희)를 찾는 미스테리 형식을 취함으로써 더욱 강화된다. 수수께끼가 던져지고 그것이 풀려가는 과정을 영화의 뼈대로 삼는 것은 이야기를 압축하고 호기심을 유발함으로써 영화적 흥미를 배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수수께끼를 풀어가는 형사의 역할인데 이 영화에서 형사는 단지 이야기의 처음을 여는 역할로 국한되어 있다. 이는 이야기하기와 듣기, 그리고 서로 이해하기의 주체는 바로 송희와 윤희이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다. 두 여자간의 상호 질투의 감정을 담아내는데 왜 제3자(수사관)가 필요했을까? 희화화된수사관의 등장을 극을 산만하게 할 뿐 흥미 유발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공간적 압축이 가질 수 있는 긴장감에 두 여자의 과거사가 끼어듬으로 인해 점차 풀려나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박철수 감독의 새로운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된 여성의 욕망이라는 주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는데 실패한 점, 그가 택한 '새로운'이야기 하기의 방식이 오히려 그의 주제 의식을 비틀어진 방향으로 끌어가는 원인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지금 충무로에서 중견 감독의 새로운 시도는 그 결과와 관계없이 시도 자체로 소중하다.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영화 산업의 현실속에 돌파구를 찾기 위한 시도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더구나 요즘애들의 입맛에 맞추느라 젊은 감각만을 찾는 요즘 충무로에서 중견 감독에게 그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일테니 말이다.

 이순진<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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