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의 '문학과 성윤리' 강연을 듣고

 여섯살난 아기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아기는 어디로 나오는 거야."
 "응, 아기는 배꼽으로 나오는 거란다."
 이런 이야기를 내 또래의 대학생이 듣는다면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단순하게 이런 한 면만 보아도 우리나라의 성교육이 얼마나 은폐되고 왜곡되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번 강연을 듣고 가장 많이 생각한 점은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특히 성에 대해서-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단순한 본능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단순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가 생존해온 이래로 성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성'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 일반 사람들은 영화의 섹스신이나 잡지의 야한신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결코 이런 것이 '성'의 전부는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의 하나는 성은(특히 섹스는)음식을 먹는 것과 같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며 우리생활의 일부라는 것이다. 마광수의 강연에서는 먼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였고, 그 다음으로 문학에 나타난 성의 왜곡성을 지적했으며 덧붙여서 우리 삶속에서 사람들의 이중성을 비판했다.
 그리고 문학에서 성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묘사되어질수 있는가를 제시했다. 문학과 성의 관계, 전혀 관련이 없을것 같은 느낌,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
 그러나 이 강연을 들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학은 성을 중심된 화제로 다루는 일을 꺼려왔다.
 왜 일까? '성'을 주제로 하면 천박한 삼류 예술로 전락해 버릴까하는 우려때문이었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문학에서 '성'은 역사,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뒷전으로 밀려서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렇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성'도 주인으로 나설수 있다.
 오히려 다른 그 어느것보다도 중요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럼 우선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학하면 사람들에게 떠올려지는 이미지는 '고상함'이 아닐까? 우리에게 문학은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고상한 단어로 만들어진 하나의 이념 덩어리로 연구할 대상이 되어 버렸다.
 마광수씨는 문학의 기능에서 교시적 기능을 배제하고 카타르시스적인 긴능을 강조했다. 그에게 있어서 문학은 꿈과 같은 것이다.
 꿈, 어떤 일탈행도도 받아들여져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상태,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도 그의 꿈에서의 일탈 행위를 막을수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꿈 속에서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이다.
 누가 꿈 속에서 애써 이성의 지배를 받으며 가식적인 행동을 하려 하는가? 그러므로 문학을 통해서 우리는 순수해지고, 솔직해져야 한다. 마광수씨의 말을 빌리자면 야해져야 한다.
 현대인의 삶은 너무나 억압받은 상태이다. 그 어느것에서 현대인은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맛볼수 있고, 기쁨을 누릴수 잇다. 그러니깐 예술의 한 부분인 문학은 그 어느 것의 특 속에 맞추어 지지않고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꿈 속에서의 일탈행위에 그 어떤 제재도 없는 것처럼 문학에서의 일탈행위 또한 용납 되어져야 한다.
 문학이 꿈과 같은 기능을 가진것이라면 문학에서 '성'이 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학에서 대리 배설이 충분히 행해진다면 현실에서 일탈행위가 감소할 것이다.
 오늘날 '세계화'의 추구가 중요한 문제인 만큼 성의 양성화 또한 그러하다. 이제 성은 음지에서 내버려둘 자식이 아니라 햇빛이 도는 거리로 나오게 해야 하는 사랑의 자식이다.
 그가 말했듯이 문학에서도 당당히 웃을 수 있는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윤수길(자행ㆍ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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