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디즘적 풍자(?)”

  우선 나는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영화의 첫 시퀸스에서 거의 격분했다.
  술에 얽힌 주인공 조나단의 집안내력을 설명하는데 동원된 설정 때문이었다.
  동학의 접주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한국정쟁 당시 좌익, 그리고 70년대 해직기자였던 선대(先代)들을 “독립자금을 운반하던 중 술에 취해서, 일경의 검문에 신분증 대신 총을 꺼내다 총살”당하거나, “노조사수를 위한 노동자들의 농성장에서 화염병을 술로 잘못 알고 마시다 실족하여 불멸의 노동운동가가 되셨다”는 식으로 내력화한 것이다. 이건 단순한 희화가 아니다.
  역사에 대한, 또 그를 기억하고 해석하여 재인식하려는 모든 ‘진지함’에 대한 우롱이 그 고통이었다.
  일렬로 연결된 일곱개의 에피소드에 등장한 일곱명의 여자와 남자들이 맺은 관계는 끔찍했다.
  여자는 “남자는 여자의 한 번 실수에 왜그리 인색하냐”며 떠나거나,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다가 주인공을 불러들여 함께 즐기자”거나, “믿기지 않겠지만 당신이 첫 남자”이므로 결혼을 종용했고, 남자는 도발적인 여자와는 즐기고, 호감을 느낀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고 차버리고, 술 취해 겁탈한 처녀에게 순전히 위협 때문에 장가를 들었다. 성적 욕망만이 넘쳐나고, 아니면 남녀 공히 ‘처녀 성’ 관념에 포박당해있고 성찰이 수반되는 사랑 같은 것은 없었다.
  만약 이것이 우리시대 젊은이들의 사랑과 성의식을 그리고자 한 일곱 감독들이 그 ‘왜곡’을 드러내고자 택한 진술방법이라면? 그렇다면 설사 의미의 ‘부여와 구언’ 사이의 간극이 넓다 해도 무방하다. 단 영화가 주제의식을 견지하고 있을 때에 한해서.
  “전통을 깨기가 이렇게 힘이 든다”는 주인공 어머니의 마지막 독백 장면은 나를 어이없게 했다. 조나단의 어린 아들이 술을 마시는 장면에 이어진 이 에필로그는 프롤로그의 ‘묵직한’ 비웃음을 한 컷에 날려버리며 영화를 ‘가볍게’ 했다.
  의미의 연관을 찾던 나는 비웃음을 당했다. 그러나 박종원 감독이 맡은 다섯번째 에피소드는 의미심장했다. 사사건건 ‘예술’을 부르짖는 오만한 시나리오 작가가 조나단의 음악이 표절이라고 주장하고, 확인결과 자신 뿐 아니라 그녀의 시나리오도 같은 영화의 표절이었음을 알게 된 조나단이 그녀를 덮친다는 것이 주 내용으로, 여기에는 이를 대여하려나 번번이 다른 사람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손님도 등장한다. 이 삽화는 영화 속 영화를 ‘성인 에로물’의 표절로 설정함으로써, 또 두 주인공을 공범이게 하여 서로를 능욕케 함으로써 만들어진 영화를, 그리고 찾는 손님까지 신랄하게 조롱했다. 여기서 내가 영화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이유’에 대한 새디즘적 풍자를 읽는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최진아<독립영화협의회ㆍ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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