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소묘
                                             한강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평화도,
오랜 지옥도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히도록
 
외등은 희고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도록
 
그의 눈을 적신 것은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중 「저녁의 소묘」
 
 
 소설 <채식주의자>로 유명한 한강 작가는 소설보다 시를 먼저 발표했습니다.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네 편을 실었지요. 시인으로서 낸 첫 시집이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인 셈입니다. 해당 시집에서는 침묵과 영혼, 신비한 언어에 대한 시가 나오고 영혼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확인하려는 시인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맑아지는 존재와 언어를 투명하게 대면하는 목소리로 가득합니다.
  ‘저녁의 소묘’ 입니다. 제목에 ‘소묘’가 들어가는 만큼, 시를 보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 봅시다. 어떤 저녁과 새벽은 피투성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노을이 지는 풍경과 해가 떠올라 하늘이 붉게 물든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가끔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우리 눈이 흑백 렌즈라면, 볼 수 있는 색이 모두 흑백이 돼, 볼 수 있는 색상도 줄어들 겁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좋겠다고 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다섯째 연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평화’와 ‘오랜 지옥’이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지옥, 우리가 다양한 색깔로 두 상황을 그려본다면 색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흑백으로 그려보면 색깔의 차이가  많이 나지는 않겠지요. 시인은 평화와 지옥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 각각의 삶도 가끔은 다양한 색의 차이에 집중하기보다 흑백으로 바라보며, 한 사람마다의 ‘삶’ 그 자체에 의미를 둘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목이 다양한 색깔로 그린 그림이 아닌, 연필로만 그린 ‘소묘’인 것도 그러한 이유인 것이 아닐까요.
  앞에서 제가 이 시가 포함된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침묵과 영혼이 등장하는 시집이라고 언급했는데, 이 시에서도 그러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바로 ‘침묵’ 이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인생의 모든 면에 평화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끔찍한 고통도 존재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그 고통이 영원하지는 않겠죠. 우리는 서로의 인생이 계속 이어진다는 점에 침묵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색의 인생도 가끔은 비슷하게 희끗한 흑백의 표정으로 보려 합니다.
 여러 종류의 인생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느껴지는 시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색들로 인생을 재단하고 있는 우리도 가끔은 흑백의 렌즈로 삶을 바라보는 게 어떨까요? 
 
 
박시현(국어국문학·3)
@garnetstar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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