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니는 곳은 집일까 학교일까 어떤 시선 속일까

  11학번으로 학부에 입학한 10년 전 추억을 늘어놓자면 학교는 비단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라 캠퍼스 전체가 내 집 같았단 말로 시작해야 한다. 배정받은 기숙사의 쾌적한 방을 두고 과 동기와 서북부까지 걸어갔다 오다가 “배고프지 않냐?” 눈치를 주면 새벽 세 시에도 과방에서 파채를 잔뜩 얹은 치킨을 주문했다.
  불 꺼진 86년식 건물에 들어가는 것도, 아리랑 고개를 산책하는 것도 내가 사는 곳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학생회실에서 밤을 새우고 화장실 안쪽 샤워부스를 이용하는 선배도, 핸드 드라이어에 머리를 말리는 친구도 있었다. 학교는 2만 명이 공동 주거하는 45만 평짜리 저택과 다름없었다.
  이 집에서 괴담이 떠돌지 않는 건 아니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충남대학교는 다른 학교에서도 있었던 일로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을 올렸다. 나는 그런 일이 이미 카카오톡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던 순간부터 계속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부가 구성한 카톡방 안에서는 그 기사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말풍선 속 언어와 흡사한 문장이 오갔다. 대거리할 필요조차 없는 ‘말들’일 뿐이라고 분노를 종료시키려 한 사람도 있었다. 대다수는 단체 채팅 안에서만 존재하는 희롱을 무시하려 했지만, 텍스트는 살아남아 이 집의 이곳저곳으로 전해졌다. 사회면을 장식한 건 무수한 대화들 중 단 한 건이었다.
  한 연구교수는 우리 캠퍼스에서 5년간 불법 촬영을 하다 사법부로 넘겨졌는데, 경찰 조사에서 1,500건으로 밝혀진 사진과 영상이 법원에선 어째서 18회로 기록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이곳에 거주하는 이들을 몰래 촬영한 건 계단과 화장실 같은 일상적인 장소였다.
  우리 학교는 사건 이후 불법 촬영 탐지를 연 4회로 늘리겠다고 했는데 저 사람은 연간 300건의 촬영을 한 것과 같다. 그러면 학교는 마치 경찰이라도 된 것처럼 불법 촬영 기기 탐색을 매일매일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계단 앞의 자판기에 서서 어딘가 있을지 없을지 모를 카메라 렌즈를 떠올리며 동전을 기계로 집어넣어야 할까? 해임당한 연구교수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은 누구를 안심시킬까?
  영남대학교에서는 교수가 다른 교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두 교수는 같은 센터에서 일하던 동료였다. 사실을 호소하고 분리를 요청한 학교에서는 사건을 은폐하려 했고 피해자는 자신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며 밖으로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대학교에서는 수년 전 디지털 성폭력에 관한 논문을 작성한 교수가 연구실로 출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연구의 실제 목적이나 주제와 달리 ‘특정 성별을 벌레로 표현한 논문’이라고 호도하는 이들이 교수를 ‘참교육’하겠다며 캠퍼스 앞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영남대학교 사건의 피해자는 “교수가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면 학생들은 얼마나 위험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아카데미이자 매일을 살아가는 생활의 공간이 불안으로 점철돼 있다. 실재하는 위협과 위계적 권력이 캠퍼스에 철창을 세우고 있다.

공연화 (여성젠더학과 석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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