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공주의 결혼

  오늘날 드라마 속 이른바 금수저라 할 수 있는 재벌 남녀주인공은 우연한 첫 만남을 시작으로 결혼이라는 행복한 결말을 맺고 오래오래 살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금수저였던 공주도 드라마처럼 결혼 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까? 
  조선 건국 초기에는 왕비의 딸과 후궁의 딸을 모두 궁주라고 불렀다. 이후 태종대에 후궁과 왕비의 딸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왕비의 딸을 공주라 부르기 시작했고, 서얼차별법이 생기며 국왕의 딸에게도 적서의 차별이 적용됐다. 이로 인해 왕비 소생인 적녀는 공주, 후궁 소생인 서녀는 옹주라고 부르게 됐다.
  조선시대의 공주는 태어난 직후에는 아기씨라고 불리다가 6~7세쯤 공주 또는 옹주에 봉작됐고, 대부분 12~15세 전후에 결혼했다. 이 때 공주와 혼인할 사람을 ‘부마’ 또는 ‘의빈’이라고 불렀다. 공주와의 나이 차이는 동갑이거나 한두 살 많았으며 때에 따라서 공주가 연상일 때도 있었다. 부마의 간택은 세자빈 간택과 비슷하게 이루어졌는데, 먼저 공주 또래 연령의 남자를 대상으로 금혼령을 내린 후, 정해진 기한 내에 간택단자를 들이도록 했다. 이러한 간택단자를 바탕으로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으로 이어지는 세 번의 간택과정을 통해 공주의 남편인 부마가 결정됐다.
  부마로 선발된 이들은 의빈부라는 관서에 소속됐으며, 첫 벼슬로 종 1품의 벼슬과 그에 해당하는 녹봉을 받았다. 또한, 대청 외교 사신 임무를 수행하거나 왕실 가족으로 왕실의 예식이나 외교적인 관례에 참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마들은 관직에 나가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제한이 있었고 양반과 달리 부인, 즉, 공주가 죽었을 경우 재혼이 금지됐다. 이렇듯 제한되는 점이 있었지만, 왕실과 사돈을 맺으면 권력이나 재력을 얻는 등 이익이 많았기 때문에 양반가 집안에서는 대를 이을 필요가 없는 아들을 부마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부마가 정해지고 나면 본격적으로 가례 준비가 시작되는데, 이때 공주의 혼인을 위해 ‘가례청’이라는 임시기구가 설치됐다. 이는 왕이 혼인할 때 설치되는 ‘가례도감’보다 격을 낮춘 것으로 오늘날 웨딩업체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가례청은 부마단자 접수, 혼례에 필요한 물자조달, 의식절차 마련, 궁방 수리 등 혼례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담당했고, 혼례가 끝나면 『가례등록』을 작성한 후 해산됐다.
  공주는 대부분 어린 나이에 혼인했기 때문에 혼인 이후에도 계속 궁궐에서 살다가 성년인 16살쯤 출궁해 남편과 함께 살았다. 출궁한 공주는 집을 살 수 있는 비용을 받거나 혹은 왕이 직접 지어준 집에서 거주했다. 또한, 여느 며느리와 같이 남편과 시부모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했으나, 왕과 왕비 등과 같이 품계를 초월한 무품의 신분으로서 남편과 시부모보다 높은 신분을 가졌다. 그리고 혼인 이후에도 왕실의 가족으로 내·외명부와 함께 궁중의 잔치, 혼인 및 초상 등 여러 행사에 입궐해 참석할 수 있었으며, 나이가 든 후에는 왕실 어른으로 높은 예우를 받았다.
  공주들도 부마처럼 재가나 개가를 할 수 없었으며 정치적 투쟁이나 시대의 변화, 불행한 혼인 생활 등으로 드라마보다 더한 비운의 인생을 산 공주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당시 일반 여성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하고 호화로운 삶을 살았으며, 신분으로 인한 경제적 특권과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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