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시사주간지 ‘Quick’에 실린 아버지의 영정을 든 아이   사진/ 5·18기념 재단 제공

  올해 5·18 민주화 운동이 40주년을 기념했다. 이를 맞이해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차례대로 살펴보려 한다. 또한 홍콩, 중동과 같은 해외 민주화의 사례를 우리와 비교해 보고 민주화의 중요성을 알아보자. 

  민주화란 무엇인가?

  민주화(民主化)는 정치·경제·문화를 포함한 사회 전 영역에서 자유와 평등을 포괄한 민주주의의 원리들이 확산되고 심화되는 과정이다. 즉 쉽게 말해 민주화란, 백성(民)이 나라의 주인(主)으로서 모든 결정에 중심이 되는(化)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민주화는 서유럽과 미국에서 근대사회의 시작과 함께 진행됐다. 영국·프랑스·미국 등이 그 선두 국가라면, 일시적으로 권위주의로 후퇴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화를 다시 이룬 독일과 일본 등은 후발 국가이다. 세계적으로 민주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아직 성취하지 못한 국가들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 민주화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에 민주주의가 도입됐으나 정착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시련이 있었다.
  - 4·19 혁명
  광복 후 1948년 5월에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해 국회를 열었다. 국회에서는 헌법을 만들어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임을 선포했고, 헌법에 따라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하지만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에 의해 대대적인 부정행위(3·15 부정선거)가 발생했다. 이는 마산 3·15 의거의 원인이 됐고, 마산에서 시작된 의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때 김주열이란 학생이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채로 발견된 것이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됐다. 시민들의 노력 끝에 이승만이 물러나고 새로운 민주 정부가 수립됐다. 
  이 시위는 이승만과 그의 지지 세력에 대항하는 반정부 세력에 의한 혁명적 시도였다. 그러나 시위 학생들과 군중들은 조직화한 지도력을 갖추지 못했고 이는 이승만 정권의 붕괴 후에 혁명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 부마 민주항쟁
  이 사건은 1979년 10월 부산·마산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이 공화당의 유신 독재에 반대해 일으킨 시위이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에 선출됐지만 이후 김영삼 총재직 정지, 의원직 박탈,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66명 전원 사퇴 제출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10월 15일에 민주 선언문이 배포되고 박정희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다. 대학생과 시민들이 유신 정권 타도를 외치며 방송국을 점령하고 세무서를 파괴하는 등 강력한 시위를 벌였지만, 군대의 출동으로 진압됐다.
  부마 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쌓였던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한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을 기념   인포그래픽/ 이정란 기자

   - 5·18 민주화 운동
  10·26 사건 이후 군사 정변을 통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국민의 자유와 정치 참여를 제한했다. 이로 인해 1980년 3월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특히 5월에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에 맞서 끝까지 대항했다. 이 사건이 바로 5·18 민주화 운동이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진압됐지만,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점점 더 커졌다.
  5·18 민주화 운동은 1950년 6·25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정치적 비극이었으며,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다. 이후 한국 사회에서 지속해서 전개된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이 됐고, 군부 독재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밑거름이 됐다.
 이 사건은 집권 세력에 대항해 최초로 무력 항쟁을 전개했지만 1970년대 저항 운동의 수준과 한계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이로부터 6월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광주를 비롯한 전 국민이 보인 저항과 참여, 연대 의식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 중요한 민주화운동 사례로 알려졌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5·18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 6월 민주항쟁
  전두환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더욱 탄압했고 분노한 국민들은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민주주의를 되살리자는 학생과 국민들의 요구가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그 결과로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대표위원이 당시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였다. 이후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6·29 민주화 선언)이 나왔다. 이에 국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할 수 있게 됐으며, 그동안 제한됐던 많은 자유와 정치 참여의 권리를 되찾았다. 
  6월 민주항쟁의 부분적 성공은 한국 현대사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배경이 됐다. 이러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달성은 1980년대 후반 사회 각 부문 운동이 분화되고 조직화되는 계기가 됐다.

해외 민주화는 어떻게?
  - 홍콩 송환법 반대시위
  홍콩 시민들이 2019년 3월 31일부터 범죄인 인도법(이하 송환법)에 반대하며 전개한 시위로, 6월에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다. 이 시위는 당초 송환법 폐지 요구에서 중국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민주화 운동으로까지 그 성격이 확대됐다.
  송환법은 중국 본토와 대만, 마카오 등 홍콩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범죄인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홍콩은 영국, 미국 등 20개국과 인도 조약을 맺었지만, 중국과는 이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해당 법안은 2018년 2월 대만에서 벌어진 홍콩인 살인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당시 홍콩인 남성이 대만에 같이 갔던 홍콩인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돌아왔는데, 홍콩법은 영국식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타국에서 발생한 살인죄를 처벌할 수 없도록 하고 있어 처벌에 한계가 있었다. 홍콩 정부는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2019년 초 송환법 개정안을 마련하면서 대만뿐 아니라 중국·마카오 등에서도 용의자를 소환했다.
  이에 홍콩 시민들은 중국 정부가 부당한 정치적 판단을 바탕으로 홍콩의 반중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 데 해당 법안을 악용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며 반발했다. 실제로 전에 중국 지도층 비리를 다룬 금서들을 출판해 오던 홍콩 코즈웨이 베이 서점의 주주와 직원 5명이 실종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위는 그 해 6월 9일 주최 측 추산 103만 명(경찰 추산 24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것을 시작으로 이어졌다. 홍콩 정부는 이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며 최루탄, 물대포 등을 동원해 강경 진압하면서 8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중국은 홍콩보안법으로 홍콩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지난 5월 28일 통과시킨 법안으로, 홍콩 내 반(反)정부 활동을 처벌할 수 있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미국은 이 법안에 반대입장을 밝혀 왔길래, 홍콩보안법이 향후 미중 갈등의 뇌관으로 부상하고 있다,
  - 중동 민주화의 대표, 튀니지
  2011년 촉발한 중동ㆍ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인 ‘아랍의 봄’ 이후 튀니지만이 아랍권에서 성공적인 민주화 과정을 이행하며 한 줄기 희망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튀니지는 ‘아랍의 봄’의 진원지로 그 기원인 ‘재스민 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재스민이라는 민주화 운동의 별칭은 튀니지의 국화에서 유래했다. 2010년 12월 과일 행상을 하던 한 청년이 독재정권의 횡포에 항의하며 분신해 숨졌고, 이에 분노한 튀니지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며 정권에 맞선 게 재스민 혁명의 계기다. 결국 23년간 튀니지를 철권 통치해 온 ‘지네 엘 아비 디네 벤 알리’가 축출됐다. 그 열기는 삽시간에 아랍권 전역으로 퍼져 중동과 북아프리카 각국의 민주화 시위 불씨를 잡아당기며 ‘아랍의 봄’이라는 말이 생겼다.
  하지만 이후 중동 국가들의 민주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시리아, 이라크 등에선 정치·사회적 갈등이 지속됐다. 반면 튀니지에서는 국민4자대화기구가 전격 결성되면서 민주화 이행 과정의 굳건한 버팀목이 됐다. 국민4자대화기구는 시민사회와 정당, 행정부 사이의 평화적 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정치권과 이슬람 간의 갈등을 봉합해 모두가 동의하는 해법을 마련하는 데 앞장섰다. 이로 인해 자칫 무산될 뻔했던 민주화의 열기가 되살아났다.

민주화의 중요성
  - 우리나라 민주화의 현황
  1987년 이후 두 번에 걸친 수평적 정권 교체, 사회 운동의 적극적 역할, 그리고 더디게 성장해 온 정당정치는 한국 민주주의를 나름대로 발전시키고 성숙시켜 왔다. 민주주의 절차의 제도화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 민주화는 군부 권위주의라는 ‘예외국가’에서 민주주의라는 ‘정상국가’로의 전환을 추구해 왔으며, 국제적으로도 동아시아 민주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성취하지 못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강화돼 온 세계화의 충격은 고용, 소득, 소비에서의 경제적 양극화는 물론 교육, 일상 생활에서의 문화적 양극화 또한 강화하고 있다. 점증하는 사회 양극화는 사회 통합을 심화시키고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침식한다. 이러한 양극화의 해소는 우리나라 민주화에 부여된 중대한 과제다.
  한편 사회갈등의 분출 또한 한국 민주화의 그늘을 이루고 있다. 민주화 과정에서 군부 권위주의 아래 억압돼 온 사회갈등이 발생하면서 자본 대(對) 노동, 개발 대 환경, 중앙 대 지방, 남성 대 여성 간의 긴장과 갈등이 지속적으로 분출돼 왔다. 물론 이러한 사회갈등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때때로 과도하게 지불하는 갈등의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갈등 조정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여전히 우리나라 민주화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우리가 민주화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
  역사적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화는 지속해서 확산하고 심화해야 할 장구한 사회과정이다. 바람직한 민주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와 정당을 포함한 정치사회가 시장의 효율성과 시민사회의 역동성을 높이기 위한 감독자로서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면, 공론장과 사회운동을 포괄한 시민사회는 국가의 합리성과 시민사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민주화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 학교 사학과 허현 교수는 “민주화는 민의를 반영하는 형식이나 절차, 혹은 정치구조만의 문제는 아니다”라며 “외적인 부분만 고려한다면 민주화됐다고 규정할 수 있는 국가나 사회는 많지만 민주화는 본질적으로 인간 존엄과 공존에 대한 문제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민주화 됐다고 자부하는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수많은 사회병리 현상들과 불평등 및 특권의 지속 문제는 민주화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이어 “서구 사회의 시민혁명들이 추구했던 이념들과 그것들이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던 원인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그 후 “인간 존엄과 공존의 원리를 깨닫고 실천해서 주인이 주인답게 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에서 민주화는 영원한 화두일 수밖에 없다”라고 마무리했다.  
  허현 교수는 청년들이 민주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실천 방안으로 “우리 청년들이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혹은 청년들이 꿈꾸는 궁극적 지향점은 무엇인지에 대한 사유가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청년들은 인간 원리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민주화임을 깨달아야 하며 그것에 바탕을 둔 미래 사회 건설을 꿈꾸고 실천해야 한다”고 답했다.
  허현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이 사회의 주인이자 인간답게 살기 위해 민주화를 중요히 바라봐야 한다. 모든 청년들이 주인의식을 지니고 나아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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