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고 보아도

  대전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2시간을 가면 정지용을 기리는 문학관과 그의 생가가 있다. 옥천, 「문학기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는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지용은 시에 능했다. 3년 전, 정지용의 미발표 시 3편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정지용은 마흔 살까지 「호수1」, 「춘설」 등 총 12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정지용의 시들은 짧지만 포근함이 느껴진다. 서강대학교 유종호 교수는 “스물여섯 살 이후에도 시인이고자 했고 그만큼 방법적 자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전문적 직업적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고 그를 평했다. 아쉽게도 정지용은 6·25 전쟁 당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던 군부 독재 시절에는 그가 월북을 한 친북 인사로 규정돼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기시됐다. 때문에 ‘정X용’이라는 이름으로 암암리에 소개됐으며, 오늘날처럼 그 이름 석 자를 말할 수 있게 된 기간은 30년이 채 안 된다.
  문학관 입구엔 시인 정지용상이 위치한다. 동상을 보았을 적에 손바닥 둘로 폭 가릴 만한 그의 얼굴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미소엔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 듯 느껴졌다. 문학관은 입장료를 따로 받지 않는다. 기자는 해설을 맡으신 분으로부터 매년 5월 즈음 그를 기리는 ‘지용제’를 엶과 동시에 ‘지용문학상’도 수상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이처럼 옥천은 정지용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정지용도 「향수」라는 작품으로 고향에 대한 애착을 잘 보여준다. 특히 입신양명해 자신의 고향을 알릴 수 있다는 점이 퍽 부러웠다. 문학관을 나설 때, 옥천군에서 제공하는 책갈피와 전자파 차단 스티커가 보였다. 정지용의 작품들을 새긴 디자인이 썩 탐탁했는데, 필자는 「별2」가 쓰인 책갈피를 골랐다.
  문학관을 떠나 조용히 정지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적이 별로 없는 생가의 모습은 을씨년스러웠다. 옛날엔 이곳에 정지용이 살았을텐데……. 지금도 몇 십 년동안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한 억울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 어쩐지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제자리에서 한동안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러나 그 자리에 같이 있던 나이 지긋한 어르신은 이곳이 당신의 옛집 같다며 정겹다고 말했다. 사실 개개인이 살아온 환경에 따라 만물을 다르게 느낄 것이다. 기자의 경우엔 물리를 굉장히 싫어하지만, 물리학자는 그것을 자신의 업으로 여긴다. 문학 작품도 같은 이치다. 아무개는 문학이 지루함의 상징이겠지만, 아무개는 문학이 하나의 취미이자 삶의 위안일 것이다. 비록 「문학기행」에서는 6개의 적은 장소를 소개했지만 필자는 이것이 인연이 돼, 문학에 빠져드는 사람이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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