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의 푸른 사다리

  “누구나 살면서 잊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다. 고통스러워서 아름다워서 혹은 선연한 상처 자국이 아직도 시큰거려서.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뛰는 심장의 뒤편으로 차고 흰 버섯들이 돋는 것 같다.”
  내가 <높고 푸른 사다리>를 처음 접한 건 우리 학교에 오기 한 해 전, 그러니까 재수학원을 다니던 때였다. 주말 자습으로 오전, 오후를 보내고 근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엔 학원 옆의 어린이공원을 혼자 걸었다. 식후 산책은 소화에 도움이 되니까. 기분전환에도 좋고. 가을바람이 사늘해지는 저녁 무렵에 우연히 라디오 낭독을 듣고는 매력에 푹 빠졌다.
  <높고 푸른 사다리>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남녀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형제애, 동료애, 인류애,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을 한국사의 아픈 줄기와 엮어 담담히 풀어간다. 작가는 계속해서 묻는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진정한 사랑이란 게 세상에 존재할까? 주인공 요한 수사는 신앙인으로서의 사랑을 알고 있다. 그것은 어떤 바라는 바도 없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동료 수사의 죽음, 연인 소희와의 이별 사이에서 사랑에 번민한다.
  독일에서 온 토마스 수사는 그런 요한 수사에게 한국전쟁 때 겪은 일을 들려준다. 덕원수도원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북한의 수용소에서 얼마나 많은 동료가 죽었는지, 그럼에도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그는 “사랑했다”고 말했다. 억류 생활 중 사망한 동료 신부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에게 사랑만 있다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 것”이라고 믿으며 무의미와 싸웠다고 말이다.
  요한 수사의 할머니는 전쟁 때 헤어진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진정한 사랑은 마모되지 않으며, 시간은 모든 거짓된 것을 사라지게 하고 빛바래게 하고 그중 진정한 것만을 남긴다고. 그다음 뉴저지 뉴튼수도원에서 만난 마리너스 수사는 흥남철수 때 체험한 사랑의 섭리를 말해준다. “저는 그 배에서 내렸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직도 그 배에 타고 우리를 구하러 바다를 항해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그 배로 초대하시죠. 여기 와서 나와 함께 저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겠니? 하고요.”
  작가는 사랑을 묻는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수많은 시련과 고독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고. 오랜 시간 끝에 요한 수사는 마음을 고백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없다 해도, 설사 다시 만나도 손길 한번 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멀리 서로 바라만 보다 돌아서야 한다 해도 사랑한다고. 이별을 앞두고 싸우다가 그 기차 안, 손길 한번에 뜨겁게 입 맞추어버린 그날들을 다시는 내 것으로 가질 수 없다 해도 사랑한다고. 네가 나를 잊고 내가 우스워져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날 돌아보지 않는다 해도... 사랑한다고. 나는 기억하겠다고.”
  작중 무대는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아담하게 모인 수도원, 옛 성당, 기념품의 집, 숙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중간에 ‘옷을 걸어놔도 괜찮을 거 같은 큰 나무’가 있다. (책을 읽어보면 무슨 뜻일지 알 수 있다.) 왜관수도원은 독일식 수제 소시지의 생산으로 유명하며, 현재는 신자가 아닌 일반인의 숙박도 허용하고 있으니 한 번쯤 방문해보면 어떨까. 마침 가을 날씨는 맑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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