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 김마리아 열사

김마리아 열사, 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한 3.1운동과 그의 도화선이 됐던 2.8 독립 선언, 그 중심엔 김마리아 열사가 있었다. 1882년에 태어난 김마리아 열사는 개화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와 친척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조국에 대한 사랑과 독립 의지를 키우며 자랐다. 김마리아 열사가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유학시절부터였다. 1915년에 동경여자학교에 입학한 김마리아 열사는 동경 유학생 여자 친목회에서 회장으로 활동하며 여성들의 사회의식과 항일의식 고취에 이바지하는 데에 힘썼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8일에 동경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개최된 2.8 독립 선언 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2.8 독립 선언의 열기를 국내에도 퍼뜨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독립 선언 운동에서 일본인 옷차림을 한 후, 옷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겨 국내로 들여왔고 수백 장을 복사하여 국내의 항일운동에 힘을 실었다.
  1919년 3월 1일 이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 중, 김마리아 열사는 이화학당 박인덕 교사와 3.1운동의 향후 대책에 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마리아 선생은 “어제는 조선의 독립운동이 시작된 날이다”로 시작해 남학생들이 크게 운동하고 있으므로 우리 여자들도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다. 여학생들도 운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함을 역설했다. 마침내 3월 5일에 여러 시내 여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조직적으로 이뤄졌지만, 이 사건에 연루돼 김마리아 열사는 3월 6일에 체포된다. 총독부 경무 총감부에 끌려간 김마리아 열사는 머리를 집중적으로 맞는 심한 고문을 받았고, 이 후유증으로 코와 귓속에 고름이 생기는 유양돌기염이라는 병에 걸려 평생을 시달려야 했다.
  김마리아 열사는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곧바로 항일운동을 재개했다. “우리 부녀들도 남자들처럼 혁혁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항일독립투쟁을 위한 여성 회원들을 모집해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조직을 확대했다. 애국부인회에서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가졌지만, 회원의 배신으로 인해 김마리아 열사를 비롯한 많은 임원이 투옥됐다.
   2번의 혹독한 옥고를 치르고 고문 후유증을 지니고 살아가다, 조국의 독립을 1여 년 앞두고 눈을 감은 김마리아 열사. 김마리아 열사는 일제강점기 핵심적인 역할을 도맡아 했을 뿐더러 핍박받던 여성들의 계몽 활동을 위해 노력하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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