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희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김서현,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

*기타 (Guitar)
  선희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노래 가사 첫 소절이 생각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선희의 유일무이한 히트곡이자 선희를 이 큰 무대 위까지 설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노래를, 관객들은 알지도 못하는 노래들을 꾸역꾸역 흘려 들으며 버텨왔건만 선희는 끝내 그 곡을 부르지 않고 무대를 내려왔다.
  무대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세션들은 퇴장하는 선희를 바라보며 당황한 듯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들은 웅성거리는 관객들의 성난 시선을 대신 받으며 내려 올 타이밍을 놓쳐버리고는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무대 아래에선 또 거기 나름대로 난리도 아니었다. 어디로 가로질러 왔는지 스탠딩 석에 있던 희경이 어느새 벌써 와 있었다. 희경은 선희를 보자마자 안부를 살피는 대신 울먹이는 표정으로 외쳤다.

  -너 미쳤니?! 갑자기 왜 그러는데? 얼른 다시 올라가자, 응?

  그때, 반짝 스타덤에 오른 선희 하나만 밀고 인생의 황금기를 꿈꾸는 소속사 사장 경선은 선희를 향해 불같이 달려 들었다. 그러나 선희는 그저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나를 살짝 그러안고는 희경과 경선을 지나 구름같이 몰려든 스탭 사이를 가로질러 복도를 걸어갔다.

  -야 이년아! 처돌았지! 당장 안 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메아리쳤다. 선희의 높은 구두 굽 소리는 그 틈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때 선희는 잠깐 주춤하더니 왼쪽 품에 나를 고쳐 안아 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구두를 벗어 들고 맨발로 걸어 나갔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가운데 선희의 맨발이 조용히 걸어 나가고 있었다. 내가 그 품에서 느낀 바는 선희의 몸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가볍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원피스 끝자락이 토성의 꼬리처럼 영롱하게 휘날렸다. 중력을 벗어난 그것이 선희라는 투명한 창으로 침범하려는 어둠을 가로막는 커튼처럼 살랑였다. 그들은 벼락 맞은 나무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멀어져만 가는 선희를,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눈빛으로 그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노려보고 있었다.

*희경
그녀가 밤새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니, 피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날 그녀가 갑자기 뒤돌아서서 퇴장을 하던 순간 당황해하던 주변의 관객들 사이에서, 나는 남달리 모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 음악 생애 가장 큰 무대 섰던 날, 그녀는 그날도 자신의 자작곡을 정말 세상 다 가진 듯한 목소리로 불렀다. 편곡은 손도 대지 않았다. 다듬어지지 않고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더라도 그녀는 온전히 처음 만들어진 날것 그대로의 악보를 따라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퉁기는 그녀의 손가락엔 천사의 날개가 돋았고 스탠딩 석 가장 앞자리에서 올려다보는 나를 발견하고 눈웃음을 지을 땐 그녀는 정말 하늘을 향하는 천사처럼 보였다. 그녀가 부르던 노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 스스로 작사 작곡한 곡들로 지난했던 무명시절을 함께 버텨 온 곡들이다. 그 곡들에 어떤 애착과 설움이 얽혀있는지, 감히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그녀를 제외하곤 나 밖에 없을 것이다.
  지방의 제법 괜찮은 국립대학을 다니던 그녀는 자퇴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십대 초반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나이라지만 오히려 달랑 그 가능성 하나만이 유일한 재산이라는 현실에 잔혹한 나이다. 그런 때를 살아가고 있는 그녀가 악보 한 장 없이 서울로 올라 왔을 적 가슴 속에 담고 온 자작곡들은 검은 안개로 자욱한 미래에 맞서는 유일한 촛불이자 어둠을 몰아 낼 성당 꼭대기에 달린 십자가 같은 희망의 칼날이었다. 그 음률들은 그녀의 정체성 자체이자 구원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그녀의 소리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그녀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 행복한 사람의 표정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난생 처음 깨달을 정도였다.
  우리가 만난 곳은 번화가의 변두리 골목이었다. 나는 그곳을 처음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했지만 그녀로서는 하루를 마다않고 앉아서 기타를 퉁기던 직장이었다. 그녀가 그곳에서 버스킹을 할 때, 그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너무나도 쉽게 비웃음을 화살처럼 쏘고서 사라졌지만 오로지 나만은 그녀의 음악이 품은 깊은 내면의 울림을 공감했다.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할수록 그녀의 한결같은 마음에서 요즘 세상에 보기 힘든 순수함이 내게 감동을 주었다. 나는 바로 그런 그녀의 진정성에 반해 그녀의 1호 팬이 되기로 한 것이다. 우리의 관계는 길게 늘어진 선의 중간마다 매듭이 질끈 묶인 끈처럼, 서로의 견해에 관하여 어긋나는 균열이 있더라도 그럭저럭 타협하며 오늘까지 지내왔다. 우리 사이는 어른이 되어 겪는 3차 성징을 함께 지내는 혈연과도 같은, 그런 관계였다.
  기타도 그녀가 상경하면서 가지고 올라왔던 그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 사실 기타라기 보단 거의 폐기물에 가까웠다. 무대의 찬란한 조명을 받는 아래 금방이라도 넥이 꺾어질 것 같은 기타가 당당히 뽐내는 광경은 난생 처음 보았다. 언제 한 번은 바디의 울림통이 살짝 맛이 간 것 같아서 이제 그만 버리라는 말을 꺼내려 할 참이었는데, 돌연 그런 내 낌새를 눈치 채기라도 했는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귀신 같이 다시 괜찮은 소리를 내는 기분 나쁜 기타였다. 또 한 번은 앰프 잭을 연결하는 부분이 부서져 사운드 홀 안으로 들어가 버린 일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녀는 지금의 소속사 사장을 만나 몇 번의 무대에 오르고 있는 엄연한 무대 가수였기 때문에 기타 앰프 사운드는 그녀의 음악 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여건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 점을 비꼬며 화두를 던지자 그녀의 핏기 여린 하얀 이목구비 위로 피어오른 초라한 표정은 마치 내가 그녀의 젊음을 삼켜버리기라도 한 듯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말라버린 비애였다. 나는 기타를 바짝 끌어안고 얼굴을 묻는 그녀에게 차마 그 이상의 뒷말을 더 붙이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 기타가 용케 부서지지 않고 위태롭게 그녀의 자작곡들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이제 막 그녀가 이제 모든 관객들이 기대하는 올해 최고의 히트곡의 첫 코드를 막 짚어야 할 찰나, 전자 장비를 다루는 세션들이 그녀의 신호를 눈치 보며 집중을 한 데 모으려던 그 찰나, 그녀의 몸이 수증기처럼 증발했다. 그녀가 무대 너머로 사라졌던 것이다.

*경선
미친 게 분명하다. 이런 큰 무대에 제깟 년 하나 올려다 놓겠다고 내가 얼마나 개처럼 기었는지 지가 알아? 어린년들은 울고불고 몸을 팔더라도 절대 꿈도 못 꿀 무대라고. 사람을 엿 먹이는데도 유분수지 그년이 아주 다 말아먹었다. 빌어먹을 지가 테일러 스위프트라도 되는 줄 아나본데 관객들이 지가 쓴 그 쓰레기 같은 자작곡들이나 들으러 온 줄 아나보지? 역겹다. 그년이 쓴 건 음악도 아니다. 당최 곡 분위기만 하더라도 장르부터가 종잡을 수 없는 이도저도 아닌 엉터리인데다 싸비가 반복되지도 않는 엉망진창인 구성에 세상물정 모르는 애새끼가 뭣도 모르고 씨부리는 것 같은 시답잖은 노랫말, 게다가 가장 가관인 건 제목 짓는 센스가 개판이라는 거다. 기타 소리도 형편없었다. 코드를 잡는 손아귀에 매가리가 없는 건 둘째 치고 그 염병할 낡은 기타부터가 눈엣가시다. 악기에 투자할 줄도 모르고 도무지 이 땅에서 음악이란 걸 할 자세가 안 되어있는 얼뜨기다. 재능만으로 딱 봐도 음악이랑 절대로 못 엮일 여자가 이 땅에서 노래로 먹고 살 돈을 번다라, 그게 다 누구 덕이라고 생각 하는 거야? 배은망덕한 년. 이기적인 년.
  난 이번 곡에 내 모든 걸 바쳤다. 어느 오밤중에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으로 셔터를 막 내리려는 약국에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가 주사기를 사서는 필로폰을 투여했다. 약기운이 올라오자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에 올라선 기분이 들었다. 거기서 닿은 하늘은 팔레트에 뿌려진 물감처럼 촉촉했고 태양과 달이 반씩 뒤섞인 행성이 떠오르더니 팔레트를 자줏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산마루를 지나치는 구름이 나를 태우고 저 새로운 행성으로 나를 데려가는 기분이었다. 초월의 세계가 있다면 필시 이곳이리라 확신하면서 장비 전원을 켰다. 전자기타의 독주 피킹이 악보 위에 그려지며 드럼 사운드가 거기에 가미돼 모니터 오선지 위에 매섭게 내리쳤다. 베이스는 어두운 저음을 뿜어내면서도 사운드에 묻히지 않고 웅장한 존재감을 뽐냈다. 곡은 점점 절정을 향해 가고 신디사이저가 파도처럼 곡 전체를 덮었다. 화룡점정을 기다리는 조립된 곡에다가 기계음으로 망토를 둘러 치장을 마침으로써 마침내 완성된 걸작이 탄생했다. 완벽했다. 내 생애 두 번 다시 이 같은 곡은 쓸 수 없을 것이다. 그 도취감에 취해 나는 한 번 더 필로폰을 깊이 주사했다. 머리가 몽롱해지고 눈자위가 풀리면서 하얀 어둠이 아른거렸다. 이건 분명 더 큰돈으로 불어나 오랫동안 초월 세계에 머물게 해 줄 것이다.
  이 노래를 감당하기 위해선 초월 세계에 닿아야 한다. 처음에 그년은 한낱 더러운 환상정도라 생각하는지 완강히 거부하면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란 어릴수록 공식이 간단하다. 감언이설로 진심인 듯 안아주고서는 귓가에 지난했던 과거사를 읊어주는 것만으로 그년의 혈관에 초월 세계로 가는 통로를 개통해내는데 어렵지 않게 해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짓거릴 벌인 걸까. 긴 시간동안 반쯤 정도로만 미치라고 넉넉하게 준건데 설마 그걸 한 번에 다 꼬라박고 완전 미쳐 버린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 추측도 빗나갔다. 대기실에서 파우치와 겉에 붙은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거기엔 내게 전달한다는 글과 그년에게 주었던 필로폰이

그대로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년에게 우린 공범이라고 귀가 닳도록 주입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던 날 밤 이미 그년 스스로 끊어 버릴 수 없는 밧줄을 매달아 놓았다.
  우선 당장은 돈줄들이 시끄럽게 짖어대는 소리부터 잠재워야 했다. 갑작스레 열게 된 긴급회의에서는 티켓 값을 전액 환불해야 할지, 아니면 일부 환불해야 할지를 두고 젊은 직원들과 중견급 사이의 의견 차이로 밤새 말이 길어졌다. 그때 내가 입을 열어 그년을 끌고 와 모조리 책임을 물릴 거라고 소리쳤다. 순간 정적이 흐르고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빠른 조치 상 회의는 일단 소속사 측에서 전액으로 환불해 주기로 결론 지었다. 그리고 직원이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내가 직접 찾아가 보겠노라고 말했다. 분위기상 아무도 내 결단에 끼어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법적 공방까지 이어지는 건 모두에게 리스크만 있을 뿐 아무에게도 득 될 게 없는 싸움이다. 하지만 그렇게 밑바닥까지 가 본 여자라면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달려드리란 가능성도 아예 배제시킬 순 없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렇다면 이쪽에도 수는 있다. 음악 하는 여자란 자고로 그 비실용적인 감성에 죽고 또 사는 법이니까 예전처럼 몇 번 안아주기만 하면 모든 게 좋아질 거다. 그러고 나서 얼마간 돈을 쥐어 주고 그 나이 때 여자들이라면 환장을 하는 유럽 여행 티켓을 끊어주면 이번 사건은 해프닝으로 일단락된다. 아내에게 야근 때문에 못 간다고 문자를 남겼다. SNS에 빠져 사는 여자니까 연예계 소식을 빠르게 알게 될 거고 그럼 회사 사정도 얼추 짐작할 테다. 아내의 뒤가 구리더라도 명분도 명확하다. 소속 직원을 걱정하는 것은 사장으로서 당연하니까.

*기타 (Guitar)
선희는 지하철을 타려다 말고 택시를 잡아탔다. 뒷자리에 올라탄 선희는 목적지를 가볍게 던지고는 나를 끌어안은 채 좌석에 몸을 파묻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어뷰 미러로 뒤에 탄 손님을 바라 본 택시기사는 기묘한 광경이라도 본 것처럼 선뜻 출발 하지 못 하고 있었다. 선희는 호흡이 남들보다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핏기가 야트막해 풍성한 머리카락이 묵직한 그늘을 드리우면서도 변함없이 하얀 피부를 빛냈다. 거기다 앙상하기까진 아니지만 다소 마른 턱선이 드러나게 고개를 옆으로 돌릴 적에 도드라지는 외꺼풀 눈 아래 유리알처럼 빛나는 우수 젖은 눈빛은 그녀의 인기요인을 처음 보는 이도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겨우 제정신을 차리고 차를 몰아가는 택시기사는 흥분이 제어가 안 되는 음성으로 뭐라 뭐라 떠들어대고 있었고 선희는 묵묵부답이었다. 선희는 창밖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지 무릎 위에 얹은 날 고개를 향해 떨구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선희는 구두를 택시에 벗어두고 내렸다. 택시가 떠나고 선희는 맨발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뭇거렸다. 선희에겐 오피스텔이 있었다. 음원 수익이 손익 분기점을 뚫고 나서도 세 배 네 배, 그 이상 그래프가 치솟자 소속사 사장이 덜컥 선물로 준 오피스텔이다. 사실 한참 전에 선희는 그 오피스텔에서 사장과 계약서에 사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선희의 두 다리에 붙어있던 날개가 찢어지고 대신 발목에 쇠사슬이 매어졌다.
  선희는 방향을 돌렸다. 한 시간이나 걸어 선희가 도착한 곳은 처음 서울에 올라 왔을 때 지냈던 원룸이었다. 그새 입주한 사람은 없었는지 비밀번호는 전에 살던 그대로 바뀌지 않았다. 벽지에 곰팡이가 흥건하니 당연할 만도 하다. 보일러는 돌아가지 않아 집 안은 냉랭했다. 선희는 검어진 발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전기는 끊긴 것 같아도 물은 나왔고 또 침대도 있었다. 선희는 길고 숱 많은 머리를 올려 묶고 가장 먼저 화장부터 지우고 세수를 했다. 방송 출현이나 사진 촬영이 잦아진 이후로 메이크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선희는 원래 화장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선희는 고단했는지 발도 씻지 않고 입은 옷 그대로 침대에 몸을 뉘어 나를 머리맡에 두고선 잠이 들었다. 무음 상태인 휴대폰에 시시각각 온갖 연락처로 전화가 오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이 왔다. 선희는 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나는 선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 없는 내가 깨어있던 밤은 세상에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 고요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선희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부산스레 노크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이 된다.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다가 선희는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셀 수 없을 만큼 가득 쌓인 것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선희는 대신 내 낡은 목을 잡았다. 선희는 자신의 첫 노래부터 시작해 마지막으로 만든 자작곡까지 연달아 연주하며 불렀다. 막 잠에서 깬 그대로의 성대로 노래하면서도 갈라지는 소리 하나 없이 맑고 고왔다. 그러다 선희는 잠시 생각에 잠겨 침묵하다가 내 줄을 느슨하게 풀어 반음을 낮췄다. 무슨 연주를 할까 기다리고 있던 내 몸이 좀 더 나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반음을 더 낮추었던 것이다. 조임이 느슨해져 이완된 몸은 비행을 갓 배운 아기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 새 자작곡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선희가 첫 소절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대답을 했다. 선희가 건넨 말은 내 몸체의 텅 빈 공간으로 들어가 풍부한 공명으로 울려 펴졌다. 그에 대한 화답으로 나는 여섯 개의 혀로 낮은 톤의 속삭임을 선희의 귓가에 불어 넣었다. 내가 줄이 조이지 않아 기분이 좋다고 하니 선희는 반음을 더 낮추어 주었다. 저절로 눈이 감기게 하는 음색은 무색의 향기가 되어 선희의 귓가에 이명으로 흘러들어 간지럽게 했다.
  선희가 웃었다.

*희경
되지도 않는 전화 통화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부랴부랴 그녀의 오피스텔로 찾아갔다. 밖에서 불이 켜진 창을 보고 얼른 달려가 문고리를 비틀었다. 비밀번호 잠금마저 풀려있어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녀가 있나 들이닥쳤지만 그곳엔 소속사 사장이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선 채로 이쪽이야 말로 기대했다는 눈빛을 쏘고 있었다. 그의 눈초리는 눈총으로 변했고 나는 나대로 김이 팍 새고 말았다. 우리 두 사람은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같은 목적이 있어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곧장 뜨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로 갔을까로 시작한 추리는 엉겹결에 침대에 나란히 누워 그녀에게도 이랬냐는 말이나 던지게 되는 이상한 맥락의 결론으로 닿았다.
그는 나이답지 않게 탄탄한 몸을 가졌다. 하지만 살아있는 인간의 몸치고는 너무 차갑고 딱딱하다고 느껴졌다. 다만 욕구에 미친 듯이 필사적인 난동에 가까운 움직임이 그나마 플라스틱 성인용품이랑 한다는 느낌만은 지워주었다. 비유하자면 그는 마치 얼어붙은 맹화 같았다. 자신은 한없이 불타오르는 줄 알겠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사실 표면을 둘러싼 한기 때문에 그를 겁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와 몸을 뒤섞고 나니 더욱 그녀를 찾고 싶어졌다. 나는 널브러진 채 말했다.

  -내게는 사명이 있어요.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그녀를 온 몸으로 받아 꺾인 날개를 다시 치료해 줘야 해요. 아시죠? 그녀가 얼마나 추잡한 꼴을 다 겪어오면서 이 자리에 왔는지. 난 당신이 비열하다고 욕할 생각은 없어요. 수단이야 어떻든 그렇게 해서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으며 여기저기 그녀의 사진을 띄울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그게 나쁘다고만 생각하진 않아요. 어차피 인간이란 서로 힘을 이용하고 빌려주는, 다시 말해 입 밖으로 꺼내긴 조금 불편한 협업 관계 속에 살아가는 거잖아요? 분명 그녀의 마음속에도 나와 같은 본심이 있을 거예요. 그녀는 아직 어려서 자기 마음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줄 모르는 것뿐이에요. 젊은 치기란 게 그렇잖아요, 현실적인 감각을 맞서 싸워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자신의 솔직한 본능을 추잡하다 여겨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빤하다고요. 역사는 생성과 파괴를 거치면서 균형감 있는 규격을 만들어 냈어요. 그 틀 안에서 안전한 궤도를 따라 공전한다면 그녀의 삶은 순풍을 탄 돛단배처럼 영원히 부드러운 파도와 청량한 바람을 맞으며 평온한 항해를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란 거죠. 삶이란, 삶이란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경선
차를 빠르게 몰았다. 과속 카메라가 보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고지서 따윌 걱정할 게 아니다. 당장 그년 머리채부터 잡는 게 순서다. 오피스텔의 불이 꺼져있었다. 그저 잠이든 것이라 믿고 싶었지만 내심 어느 정도 불안을 예측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보니 냉기가 가득했다. 불을 켜도 냉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는 와중에 문이 벌컥 열렸다. 설마 하는 마음에 벌떡 일어났는데 역시나였다. 그 빠순이였다. 기다리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뭐 나쁘진 않았다. 얼굴만 바뀌었을 뿐이지 일단 이 오피스텔에 여자랑 단 둘이 있다는 것만큼은 소정의 목적을 이룬 셈이니까.
  생각보다 수작은 일사천리 풀렸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얼굴도 제법 반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영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년에 비해 가장 극명한 차이는 부드러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집에서 그러듯 아내와 의무적으로 부부관계를 해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년은 뭐랄까 일종의 섹스의 즐거움 없이, 속이 텅 빈 대나무처럼 공허한 신음소리만 하염없이 위로 툭툭 던지며 인생을 허비하는 대나무 숲 같았다.
  그녀가 나불대는 말들은 섹스가 끝나자마자 꺼낼 대화 주제는 아니었지만 곧 나도 격정에 전염되어 목적의식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래서 어린 여자는 안 된다는 거야. 알아? 예술의 기저는 광기란 걸. 쳇 베이커도 말이지, 그 좋은 걸 팔뚝에 꽂아 넣고 재즈에서 하나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 냈거든. 커트 코베인은 마약에 절은 입술로 죽음과 입 맞추면서 신화가 되었다고. 그년은 물러 터졌어. 진짜 예술의 경지와 맞닥뜨릴 배짱도 없는 애송이가 신념이랍시고 땡깡을 부린다는 거? 그건 단지 아집에 불과한 거야.
  나는 담뱃불을 붙이고 말을 계속 이었다.

  -자, 내가 삶의 진리를 말해주지. 세상엔 정답이 있어. 크기가 다른 세 겹으로 포개어진 벤다이어그램을 떠올려봐. 가장 안쪽 영역엔 룰이 있지. 이것은 사회가 규정한 법이야. 그 바로 한 꺼풀 위에 덧씌워진 것이 바로 탈선이야. 이것은 법 테두리 밖이며 법보다 훨씬 영역이 넓으므로 그 좁아터진 준법의 영역에선 결코 할 수 없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곳이지. 그리고 세 번째, 가장 바깥 쪽 영역에 있는 인간의 생이야. 행복이란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바로 그 세 번째 영역 안에서 유한한 인간의 목숨이 끝장날 때 까지 얼마나 효율적으로 그 공간을 활용하는가에 달려있는 거지. 가만 생각해 보면 법이니 탈선이니 하는 것들도 수명이 약 백 년으로 한정 되어 있는 조건 아래에선 다 하찮단 말이야. 어차피 죽음이란 종착지는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모두 같은 거 아니겠어. 신이 있고 없고는 그 뒤의 문제니 지금에야 알 바 아니야. 가장 인생을 낭비 없이 사는 것은 두 번째 테두리 가장자리를 아슬아슬하게 타며 사는 것이라고. 그년에게 그걸 알려 줘야 해. 내가 인생을 낭비 없이 사는 방법의 지름길로 횡단하려면 그년이 필요하거든.

*기타 (Guitar)
선희는 눈을 감고 있다. 아까부터 계속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선희를 찾는 사람들이 선희가 이곳에 있다는 걸 찾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저 현관문도 흔들림 없이 가만히 닫혀 있을 뿐이다. 나는 불안에 떠는 선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일부러 몸을 기울여 바닥으로 넘어졌다. 진흙탕에 첨벙 구르는 듯 음률이라고 할 수도 없는 엉망인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선희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내게 와 부서진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선희가 나를 빤히 들여다보는데 음을 많이 낮춰 놓은 줄이 느슨해서 팔랑이는 당나귀 귀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선희는 나를 무릎에 뉘이고 한 음 한 음 뜯어가며 조율을 맞춰주었다. 그러는 동안 선희의 얼굴에도 차츰 안정이 돌아오는 듯 보였다.

*희경
그녀가 예전에 살았던 원룸 방에 들이닥쳤다. 휑하니 열린 베란다에 커튼만 휘날릴 뿐 여기도 허탕이었다. 나와 소속사 사장은 말없이 잠시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의 자살 소식에 대한 추측성 기사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네티즌들이란 청력보단 목청이 더 큰 족속들이다.
  죽음이라. 그녀가 그런 대담한 선택을 하고 행동으로 옮겼을까. 하긴 정상의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그만큼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지는 화젯거리이다.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건 고도의 전략이 될 지도 모를 아이디어다. 우리나라에선 유명인은 죽고 나서 더 찬란한 조명을 받게 된다. 그녀에게 충분조건이 넉넉하다 못해 넘쳐난다. 이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의 여성이라는 점부터가 일단 그렇다. 오늘날은 젊다는 것이 거의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으며 여성이라는 민감 요소는 더더욱 사회의 분노를 조장할 것이다. 또한 상승세를 타고 있어 아쉬울 게 없는 입장이라는 측면에서 사람들은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에 다양한 주장과 억측이 난무할 것이고 그 해괴망측한 소문들은 SNS를 통해 일파만파 퍼져 그녀의 미스터리한 분위기에 베일을 계속 씌어나갈 것이다. 그렇게 의문의 가지가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뻗어 나간다면 아마 김광석이나 장국영처럼 하나의 전설로 자리 매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베란다 너머로는 살랑거리는 하얀 커튼 사이로 뻥 뚫린 공간만 보인다. 그 원피스 끝자락 같은 커튼 틈으로 드러나는 네모난 빛은 미사기도가 울려 퍼지는 성당의 거대한 문처럼 보였다. 그러자 내 발 앞에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가 너무 무섭게 느껴졌다.
  그녀가 갈 만한 곳을, 이제 나는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변두리 골목을 떠올리지 않은 건 아니나, 그곳에 가더라도 역시 그녀를 마주칠 순 없을 것이다. 왠지 그녀가 점점 나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혈연 같다 믿던 사슬이 끊어지고 그녀가 내게서 아주 멀리 떠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경선
방은 텅 비어있었다. 베란다 문만 훤히 열려 있었다. 이런 곳으로 돌아올 리가 없을 거라 했건만 빠순이가 박박 우겨대는 통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셈치고 와보기는 했다.
  인터넷엔 어쭙잖은 루머가 떠돌고 있었다. 나는 그년이 지 목숨 하나 끊을 용기 따윈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이 따위 조잡한 기사를 어떤 새끼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윤리니 도리니 동정심 같은 그런 걸 긁어모아 시끌벅적하게 소송을 키우면 제법 돈은 뜯어 낼 순 있겠거니 계산이 되었다.
  죽음이라. 고작 값싼 동정이나 받을 수 있겠지. 요즘 같이 자살한 사람에게 사소한 모독감도 용납하지 않는 시대엔 말이다. 어쩌면 그 선택이 현명한 걸지도 모른다. 젊은 여가수가 이렇게 깽판을 친 이상, 다시 재기하는데 어마어마한 리스크를 안고 가는 것이다. 빈약한 몸뚱이가 약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퇴폐적인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최악의 수를 고려해 봤을 때 재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차후의 행보가 현재의 화제성을 따라 가지 못하고 한때 반짝했다가 사라진 가수로 남아 TV 프로그램의 사건사고 특집 방송에나 간간히 얼굴을 비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 차라리 죽어버려라. 죽어서 네 목숨의 값어치를 최댓값으로 올려놔라. 그것으로써 네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 우리 회사에 답례하는 신사적인 태도다.
  이제껏 그년을 얼추 감각으로 쫓고 있었는데 이젠 그 감각마저 사라진 듯하다. 베란다 너머로 텅 비어버린 여백 사이로 어떤 초월 세계가 스쳐 지나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구름은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자줏빛 하늘과 반대 방향으로 꺾어져있었다. 그러자 무슨 영문 모를 공포로 팔뚝의 주삿바늘 위로 소름이 돋았다.
  그때 그년 발모가지에 매어 둔 밧줄이 아예 끊어지고 만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점점 희미해져 간다.

*기타 (Guitar)
선희는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내게 말하며 갈수록 심하게 불안을 느끼는 것 같아 보였다. 나를 바짝 끌어안아 선희의 가슴이 폭신하게 밀착되는 그 순간 격정적으로 몰아치는 고동이 저릿하게 느껴졌다. 선희와 일체가 된 지금 나는 그제야 선희를 괴롭히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무엇인지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두 개의 다른 소리가 불규칙하게 어울려 선희의 하나밖에 없는 심장에 달린 귀를 들쑤시고 있었다.
  그날 선희는 무대 뒤로 퇴장했지만 아직 무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여섯 개의 혓바닥을 끊었다. 팅팅팅팅팅팅. 내 혓바닥들이 저음부터 고음까지 차례로 깨끗한 소리를 내며 널브러졌다. 혀가 끊어진 나는 이제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선희도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침묵은 하나의 의미를 찾아냈다. 선희는 내 혀를 다시 감아주면서 선희 자신도 굳은살이 박힌 좀 더 굳센 목소리를 갖게 될 것이다. 선희는 혀가 끊어진 나를 그러안고 배란다로 향했다. 그리고 가볍게 베란다에서 훌쩍 내려왔다. 선희의 검은 발바닥이 공중을 걷는다. 청명한 하늘은 망망대해가 되어 좌표 모를 바다의 한 가운데로 우릴 밀어 넣고 선희는 투명한 구름이 되어 바람과 한 몸이 된다. 원피스 끝자락으로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민들레 꽃씨가 스쳐간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멎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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