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지만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클리셰 속으로

 클리셰가 낯선 당신을 위해 준비했다. 앵두 같은 입술, 베일 듯한 콧날, 백짓장처럼 하얀 피부,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보석을 박은 듯한 눈동자, 바람에 날아갈 듯한 몸…혹시 이 표현들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클리셰를 알고 있는 것이다.

 흔하고 익숙한 그 것. 클리셰란?
 클리셰는 본래 인쇄에서 사용하는 연판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파생됐다. 판에 박은 문구 또는 진부한 표현을 가리키는 말에서 파생된 비평 용어다. 클리셰의 가장 큰 특징은 해당 표현이나 설정이 자주 사용돼 참신함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흔하지만 익숙하고, 그렇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설고 어려운 클리셰는 생각보다 우리 생활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 학교 언론정보학과 손병우 교수는 “클리셰는 문학 작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TV뉴스는 클리셰의 전형적인 예”라며 “생방송이지만 녹화된 브리핑 전달로 일관하는 방식, 시청자와 달리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는 앵커, 실상에 와닿기보다 표준 문체를 훈련받은 톤으로 읽는 기자의 모습 등이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또 손병우 교수는 “TV드라마에서 시청자들이 상투성과 참신성을 구별하는 민감성 역시 시청자들이 클리셰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며 클리셰의 영향력이 우리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시사했다.

 클리셰, 양날의 검
 지나친 클리셰의 사용은 상투적인 표현을 통해 이야기의 흐름을 지루하게 만들어 시청자를 피곤하게 만든다. 작품에 대한 성찰 없이 반복되는 클리셰는 같은 장르 작품들의 내용을 획일화되게 만들고, 표절과 클리셰의 사이에서 논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아이유의 '분홍신'이 넥타(Nekta)의 ‘Here's us'와 흡사하다며 표절 의혹이 제기 된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전문가들은 표절이 아닌 스윙재즈 장르의 클리셰라고 말한 것과 달리 대중들은 두 음악을 표절로 받아들였다. 또한 2013년 불거진 참붕어싸만코 광고의 코카콜라 광고 표절 논란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많은 네티즌들이 해당 광고에 대해 표절 의혹을 제기하자, 당시 회사 관계자는 표절이 아닌 영화 ‘디스트릭트9’나 ‘인피니티’처럼 외계인의 우주침공이라는 장르적 클리셰를 차용했을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클리셰에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클리셰는 상투적이고 익숙한 표현의 사용을 통해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관계 등을 함축적으로 파악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특정 장면이나 설정을 통해 관객들에게 콘텐츠의 맥락을 파악하게 만들기도 한다. 손병우 교수는 “클리셰는 영상 구성단위들이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시시한 반복으로 불만을 사기도 하고, 반대로 참신한 시도로 찬사를 받기도 한다”며 “드라마 ‘나쁜녀석들’은 매 회 할리우드 범죄 영화의 설정 등의 클리셰를 적극 참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질감을 나타내는 쇼트를 통해 생동감을 불어넣었다”며 “인물 클로즈업 장면에서 화장이나 조명으로 감추려고 애쓰는 주연들의 피부 질감을 그대로 표현한 것은 쇼트(촬영의 기본 단위로서 한 번에 촬영한 장면)의 참신성이 신(한 개 이상의 쇼트가 이룬 장면)과 시퀀스(몇 개의 신이 모인 장면)의 상투성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라고 말했다.
 클리셰는 제작자들에게도 익숙하지만 한편으로 어려운 존재다. 이봉주 촬영감독은 “제작자들도 작품 속의 클리셰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그 선을 어떻게 교묘히 넘을 것인가라는 줄타기를 매 순간 한다”며 “지나치게 창의적인 작품은 자칫 작위적인 것이 될 수 있기에 클리셰와 창의적 요소라는 양날의 검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는 창작자에 있어서는 영원한 숙제”라고 말했다.
 
 클리셰의 과도한 사용은 자칫 표절과 지루함으로 이어질 수 있고, 클리셰의 지나친 지양은 작위적인 연출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시청자뿐만 아니라 제작자들의 깊은 성찰을 통해 클리셰가 ‘익숙한 것의 편안함’이 아니라 ‘익숙한 것의 불편함’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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