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하루

     

        녹슨 하루                            안재욱(충남대학교 국어교육과·4)

 

 

 

  아침은 언제나 고단하다. 나는 아침이 항상 두렵다. 혼자 일어나는 것은 이미 익숙해졌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을 매일 찾아야 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내가 학생이라는 것. 어지간한 의무들은 학생이라는 이름 아래 집행유예 된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학생이라는 자리가 생각보다 매력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이제 학생이라는 옷을 입고 침대에서 이불을 걷은 후 나가야한다. 오늘은 주말이 아니고, 방학은 더더욱 아니니까.
  수업은 항상 지루하다. 귀찮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 어쩌면 평범 이하인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교수님들은 너무 지적인 존재이시다. 애초에 학문 자체가 난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 보기에는 쉬워 보이고 아무 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대학생인 나는 고등학생이었던 나보다 더 멍청해졌나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단어들이 낯설기만 하다. 내 옆에 있는 애는 이걸 알아듣고 있을까? 나는 순식간에 작아졌다. 시작된 모든 것은 끝을 향해 나아가는데, 나는 시작조차 못하고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수업이 멀어진다. 교수님의 말씀은 헤겔의 화살처럼 나에게 닿지 않는다. 반의 반..그 반의 반..반의 반의 반.. 나는 졸지에 귀머거리가 된다. 닿지 않은 말씀들은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아이들을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다. 어디에 넣어야 할까. 종이류? 캔? 어차피 잘 모르는 쓰레기들은 일반쓰레기에 넣어버리면 그만이다. 일반쓰레기. 참 잘 지은 말이다.
  귀머거리가 된 나라도 교수님의 수업 끝내는 소리만큼은 잘 알아듣는다. 그건 오감이 반응하기 때문이겠지. 같은 과 애들이 점심 먹으러 가는 소리가 들린다. 어차피 그들에게 나는 명부상의 인물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나 또한 이제 와서 잘 모르는 애들이랑 밥 먹으러 가는 일이 기쁠 리 없다. 그 점에서 11시 30분에 끝나는 이 수업은 혼자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기에 아주 적절한 수업이다. 우리 학교 학생식당에서 몇몇 유명한 메뉴들이 있지만 나는 가장 빨리 먹을 수 있는 짬뽕을 주로 먹는다. 기다릴 필요 없이 계산하고 가면 바로 받을 수 있고 맛도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혼자 짬뽕이 옷에 튀지 않게 조심해서 먹으면서 다음 수업은 어디였더라, 오늘 짬뽕은 평소보다 조금 맵네, 이거 다 먹고 나서 매점 갔다가 오렌지 주스 마셔야지. 같은 생각을 한다. 수업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동아리방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동아리 생활은 조금 귀찮지만 이렇게 동아리방을 사용할 수 있어서 확실히 편리하긴 하다. 이런 장소가 없으면 수업이 비는 시간 동안 있을 곳이 마땅치 않다. 매일매일 카페를 갈 수도 없는 것이고,  설령 돈이 많아서 카페를 간다고 해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별로 오래 있고 싶은 공간은 아니다. 여기 동아리방이 이어폰 꼽고 혼자 책도 읽거나, 스마트폰 하면서 시간 죽이기에 아주 안성맞춤이다.
  수업 들으러 가는 길에 눈에 보이는 캠퍼스에는 여기저기 달달함이 뿌려져 있다. 이맘 때 쯤의 캠퍼스는 항상 밝고, 화사해 보인다. 그러나 대학 생활을 오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저 뿌려진 달달함을 비추는 것은 아스팔트 도로라는 것을. 시커먼 아스팔트는 어느 샌가 내 발목까지 차오르더니 요즘은 수업 끝나고 집에 가는 날 놓아주질 않는다. 야, 너 집에 가려고? 도서관에 안가? 졸업은 해야지? 물론 너 같은 애가 졸업한 다음에 취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스팔트가 말도 잘하네.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짜증이 난다. 그래, 나도 사회에 나가야 하는 건 아는데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두렵다. 난 항상 스펙의 무용성을 주장했는데, 그건 그저 자기 방어기제에 불과했다는 것. 그걸 인정하면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의 약점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라고 누가 그러던데, 아직 나는 강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오후 수업도 오전 수업과 별다를 것은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오늘 하루도 어떻게 잘 넘어갔다는 기분으로 집에 갈 수 있다는 것 정도랄까. 가방을 둘러메고 이어폰을 귀에 꼽은 후 집으로 향할 때가 하루에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다. 혼자 있는 것이 사회적으로 허락되는 몇 안 되는 경우라는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자취방까지는 상념에 빠져 걸어가다 보면 20분도 안 걸려서 도착한다. 가방을 풀어놓고 외투만 의자 등받이에 걸친 후 바로 침대에 눕는다. 현재 시각은 오후 네 시. 금세 배고파진 나의 뱃속이 저녁은 뭘 먹을 것이냐 묻는다. 머릿속으로는 현재 통장 잔고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엊그제까지 20만 원 정도 남아 있었는데,  어제 옷 하나 사고 저녁에 맥주 한 캔 먹었으니까, 18만 원 정도 남아 있으려나. 그래도 혹시 몰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서 돈 들어오지 않았을까? 말도 안 되는 희망을 가지고 은행 어플리케이션에 접속해서 잔액조회를 해보면 내가 생각한 금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숫자가 적혀있다. 그럼 그렇지. 원래 인과가 없는 돈이 내 통장에 들어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뜬구름이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원하고, ‘혹시’에 의존해서 판단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대개 그런 생각들은 자신의 안에서는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이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는 부끄럽다. 세간은 그런 생각을 ‘공상’이라 부른다. 공상은 비어있는 생각이다.  그래서 공상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0에는 무엇을 곱하던 0이다.
  그러나 아직 내가 사용 가능한 금액이 있다는 것은 희망적인 일이다. 물론 아직 다음 용돈 받는 날까지는 멀었지만 오늘 저녁 정도는 사먹을 수 있겠지. 자취방에도 쌀에, 참치에, 라면까지 먹을 것들은 다양하지만 나는 저 가스레인지 켜는 것조차 귀찮은 사람이다. 사실은 뭐, 가게에 가서 먹는 것이 더 귀찮을 지도 모르지만 기분의 문제랄까. 일단 지갑에 돈이 있으면 쓰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내일 쓸 돈을 오늘 쓰고. 원래 미래를 생각하라고 만들어진 뇌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신도 별 생각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요즘 든다. 사실 조물주도 우리 만들 때 어지간히 귀찮았을 것이다. 그 귀찮은 와중에도 이 정도 만들어주셨으면 감사해야지. 역시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오늘에 만족하기 편하다.
  저녁은 자취방 앞 순두부찌개를 포장해서 먹는 것으로 결정했다. 4000원에 밥도 많이 퍼주는 고마운 식당이다. 요즘 도시락 가게들도 뭣 좀 먹으려고 하면 기본 4000원은 넘는데 순두부찌개가 4000원이면 아주 훌륭하지. 나는 통장 속에 있는 잔금들에 대한 생각을 지우면서 오늘도 훌륭한 선택을 했노라 자기 합리화를 시도한다. 돈이 부족해진다면 엄마에게 우는 소리 하면서 용돈 좀 달라고 하면 되지 뭐. 어차피 나는 매 학기마다 성적 장학금도 받고 있고, 이 정도 용돈을 달라고 할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 어머니께 전화를 하는 건 항상 불편하고 한편으로는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생각되는 일이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나는 월 말이 되면 항상 당연한 듯 엄마에게 전화하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일상적인 일이라 아예 그 금액까지 포함해서 앞으로의 생활 계획을 짰다. 그러고도 돈이 모자란 달들이 많아서 결국엔 나는 있지도 않은 자격증 시험 신청비라던가, 교재값을 다시 청구하는 것이다. 죄책감은 없다. 나는 내 또래 다른 아이들보다는 돈이 많이 안 들잖아? 서울을 간 것도 아니고, 사립대를 가서 한 학기에 등록금만 400만 원 이상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효도하는 거지. 합리화는 대학생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자기방어기제이자 스스로에게 주는 면책권이다.
  식당에서 포장해온 순두부찌개를 먹을 준비를 하고 있다. 포장용기에 담긴 순두부찌개는 뚝배기에 담긴 것만큼 먹음직스러워 보이진 않지만 자취생이 보기에는 충분히 훌륭하다. 국물이 새지 않도록 싸놓은 랩을 조심스레 벗기고는 밥과 반찬이 담긴 곽들을 풀어헤친다. 순두부찌개의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순두부를 자칭하고 있는 연두부, 거의 안 풀어진 계란, 파와 얼큰해 보이는 시뻘건 국물. 이 네 가지만 있으면 오늘 저녁은 진수성찬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나는 나무젓가락과 투명한 플라스틱 숟가락을 마저 뜯고는 조심스레 국물을 한 수저 떠먹는다. 여느 때와 같은 얼큰하고도 조미료 맛이 풍부한 국물이다. 국물이 넘치지 않도록 조금씩 밥을 말아서 김치와 함께 입에 넣는다. 이때, 눈이 심심하지 않게 스마트폰으로는 어제 한 예능 프로그램을 다운받아서 밥그릇 옆에 놓는다. 오후 다섯 시의 조금 이른 저녁. 그러나 하루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다. 눈도 즐겁고 입이 행복하면 사람의 자극은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넘치는 만족감. 앞으로 해야 할 과제들은 이 순간만큼은 기억에서 삭제된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이 순두부찌개를 얼마나 맛있게 먹느냐, 그리고 이 식사시간에 맞춰 어떤 예능프로그램을 적절하게 배치할 것이냐, 이 두 가지가 최우선순위이다.
  식사가 대충 끝났다. 배가 잔뜩 부른 나는 그릇을 치우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아직도 예능프로그램이 끝나지 않은 스마트폰을 들고 침대 위로 올라가 벽에 기대어 앉고는 이불을 끌어서 다리를 덮는다. 지금 눕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은 내 위장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너에게 몸에 좋은 음식을 주거나 건강한 생활습관을 보여주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언제나 생각하고 있어. 위장을 잘 다독거리면서 눈은 계속 스마트폰을 주시한다. 그러면서 머리는 오늘 할 과제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본다. 아마 내일 오전 10시까지 제출해야 하는 전공과제가 있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요약정리한 후 간단한 레포트를 쓰는 것이었으니까 그리 어려운 과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 과제를 미리 할  필요는 없다. 그래, 이 예능을 다 본 다음에 천천히 생각하자. 저 그릇은 언제 치우지? 아, 치워야 되는데 귀찮으니까 일단 놔두자. 그런데 오늘 내가 밤에 약속이 있던가? 기억이 잘 안나는 것을 보니 오늘 저녁은 특별한 술 약속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면 과제를 할 시간은 충분하니까, 일단 휴식을 좀 취해볼까. 뭐 지금도 충분히 쉬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쉬기 위해서는 저 그릇들이 걸리적거리니까 일단 저것들은 먼저 치워버리자. 굳은 결심을 한 나는 잠시 스마트폰의 동영상 재생을 멈추고 일회용 젓가락과 숟가락을 용기 안에 구겨 넣고 용기째로 비닐봉지 안에 넣어 봉지를 묶고 베란다에 던져둔다. 세탁기와 건조대가 있는 베란다는 벌써 이런 포장용기나 도시락용기들을 하나씩 품고 있는 봉지로 인해서 발 디딜 틈도 거의 없다. 그래도 별 냄새는 안 나니까 큰 문제는 없겠지. 이번 주말에는 꼭 저 쓰레기들을 치우리라 하고는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침대에 다이빙했다. 이쯤 되면 누워도 괜찮겠지.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스마트폰의 동영상을 일시정지에서 재생으로 바꾸고 낄낄대면서 웃는다. 의무와 책임은 아까 순두부찌개 용기에 담아서 봉지에 같이 묶어두었다. 그들이 나에게 오려고 발악해도 비닐봉지가 막아줄 것이다. 비닐봉지는 방수도 되니까 저런 상념들이 나오는 것도 막아주겠지. 베란다에서 바스락대는 비닐봉지의 소리가 마치 봉지를 뚫고 나오려는 의무와 책임의 몸부림으로 들린다. 너희들이 아무리 발악해도 뚫고 나오진 못 할걸? 비닐봉지는 무려 방수도 된다구.. 네까짓 놈..들이 함부로 할..수 있는..그런..게..아니..라..고..
  눈을 뜨니 오후 9시다. 저녁을 먹자마자 바로 잠 들었더니 뱃속은 아주 트지-하다. 핸드폰을 들어서 혹시 연락 온 곳이 없는가 들여다보지만, 원래 나에게 따로 연락할 놈들은 술 먹자는 놈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역시나 나에게 온 메시지는 단체 메시지방밖에는 없다. 메시지는 확인하지도 않고 메시지방을 들어갔다 취소 버튼을 누르고 나온다. 어차피 대충 보이는 메시지의 흐름에서도 나를 찾는 기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가 속이 안 좋아져 바로 벽에 등을 기대고는 습관적으로 SNS를 켰다. 그 사이에 업데이트된 사진이라던가 글이라던가는 보이지만 역시 나와 큰 상관은 없는 것들뿐이다. 문득 미뤄놓은 레포트가 떠올랐다. 슬슬 시작하지 않으면 위험할 시간이 되었다. 그래도 내 가슴 한구석에는 ‘솔직히 내가 레포트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이면 끝난다.’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솟구치는 자신감은 나를 천재로 만들어버린다. 그래, 나는 천재니까, 아니 뭐 천재는 아니더라도 남들보다 머리는 좋으니까 이 정도 과제는 한 시간이면 끝날거야. 방금 잠도 잤으니까 오늘은 한 새벽 두시 정도 까지는 자려고 해도 못 자겠네. 굳이 지금 안 해도 되는 것을 당겨서 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논리정연하게 나 자신을 설득하곤 다시 스마트폰을 켜서 웃긴 자료들은 없는가 뒤져본다. 창을 내리고 내리다 보니 십분도 안돼서 아까 봤던 자료들이 다시 보인다. SNS를 끄고 인터넷을 돌아다닌다.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꽤 큰 점수차로 지고 있다. 나는 인터넷도 꺼버리고 그냥 천장을 바라보고 눕는다. 천장에는 누리끼리한 얼룩들이 하나의 도형을 만들고 있다. 이 집이 적어도 20년은 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20년이 넘었든, 30년이 넘었든 내 등 하나 붙일 곳이 있다는 것은 역시 행복한 일이다. 어렵게 이끌어낸 행복감을 만끽하며 잠은 오지 않지만 눈을 감고 이 평화로움을 즐기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한다. 이렇게 연속된 진동은 전화가 왔음을 나에게 알려준다. 바로 전화를 받았더니, 다른 과 친한 친구다. 얘가 전화했다는 건, 99% 지금 술 먹자고 하는 것이겠지.
  “야, 어디냐?”
  받자마자 어딘 지부터 묻는다. 이 또한 익숙한 일이다.
  “어디긴 어디여, 집이지.”
  사실 집 아니면 갈 곳도 없다.
  “30분 뒤에 항상 가던 술집 앞으로 와라.”
  이렇게 제안을 했을 때 바로 나가는 건 내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이럴 땐 한 번 튕겨준 후에 못 이기는 척 나가는 것이 정답이다. 어차피 아쉬운 건 저 쪽이다.
  “그래.”
  그러나 인생엔 정답이 없다.
  점퍼 하나만 슬쩍 걸치고 나간 거리는 아직 쌀쌀하다. 해가 진 후에 어둠이 슬슬 기어들어오면 거리는 낮에 보았던 곳과 같은 장소라는 것을 실감하기 힘들 정도로 젊음, 소란스러움, 질척함, 그리고 방탕함이 흘러나온다. 어쩌면 그것들은 모두 같은 단어일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는, 물론 지금도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대학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이런 시끄러움이 즐거움으로, 번잡함이 화려함으로 보였는데 몇 년 사이에 내 눈은 바꾼 안경처럼 세상을 달리 보고 있다. 거리를 지나치고 자주 가던 단골 술집으로 간다. 안주는 꽤 싸고, 맛은 비교적 없는 편이지만 어차피 혀에 술만 부어주면 혀도 취해서 안주 맛은 좋으나 나쁘나 그게 그거다. 그러면 싼 게 이득이지. 술집에 오니 친구도 마침 도착해 있다. 둘이 간단히 소주 한 잔 하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야, 요즘에 뭐 없냐?”
  사실 술 먹자고 부른 다음에 하는 얘기는 소재가 달라서 그렇지 전체적인 흐름은 항상 똑같다. 요즘에 잘 되가는 여자 없느냐, 이번에 누구랑 누가 사귄다더라, 누구는 상태 메시지를 보니까 헤어진 것 같더라, 그리고 마지막은 항상 ‘우리 옛날에 참 어리고 철도 없었지만 참 재밌었는데..’. 이 래퍼토리는 4년째 우려먹고 있는 중인데도 질리지도 않는다. 맨 정신에 하면 시덥잖은 얘기도 술이 들어가면 최고의 소재로 변한다.  술이 독인 것은 분명하나, 이 몸에 쌓인 독들을 풀려면, 결국은 이독제독이다. 나는 오늘도 열심히 술로써 독을 배출하고, 다시 그 술로 독을 만든다. 늘어가는 것은 웃음과 욕설이요, 줄어드는 것은 지갑과 판단력, 그리고 인간성이다. 독은 뇌까지 스멀스멀 기어온다. 입이 꼬인다, 눈이 감긴다. 흘러가는 시간에 가운데 손가락을 든다. 지나간 시간 따위 어차피 다시 만날 사이도 아닌데 엿이나 먹으라지.

  집에 돌아왔다. 취기를 거나하게 느끼며 일부러 발걸음을 더 꼬아서 옷장으로 향한다. 점퍼를 옷걸이에 걸어 구겨지지 않게 옷장에 넣는 자신을 보며 취하긴 취했어도 이 정도 상태면 쓸 만하지 않은가 흐뭇해한다. 다음 순서는 어딘가.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들을 바닥에 휘휘 던져 놓고 몸도 침대에 던진다. 엎드려 있는 이 자세가 편하다가도 불편해질 때쯤 다시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본다. 눈꺼풀이 이미 덮고 있는 눈이 볼 수 있는 것은 눈꺼풀의 뒷면이 아닌 어둠밖에 없지만은 그것은 눈꺼풀을 연다고 해도 마찬가지. 이러나저러나 내 의식이 십분 안에 끝날 것이라는 것은 경험이 없었다고 해도 알 정도로 분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 뇌리를 스치는 하나의 단어는 내가 의식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에 성공했다. 과제. 대학생과 가장 밀접한 단어들 중 지금 내게 가장 밀접하면서도 밀어내고픈 단어. 아까 내가 미루고 미뤘던 과제는 아직 완성되기는커녕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켜서 취중 과제라도 하는 것이 옳다는 중추신경의 SOS신호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등을 침대에 둔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냥 내일 일어나서 하자. 난 머리가 좋으니까 레포트 따위는 일어나서 한 시간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게다가 난 지금 취했으니까 지금 과제를 하더라도 엉망으로 만들 게 확실하지. 그렇게 된다면 어차피 내일 일어나서 수정해야 될 것은 마찬가지니까 지금 하나 내일 하나 내가 내일 아침에 과제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과제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현명한 자는 일을 두 번 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나의 이성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 따라 이성의 승률이 영 좋지 않다. 그다지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이성이다. 이런 이성에게 내 판단의 반을 맡겨도 될까 의심스럽다. 차라리 감성 일변도로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긴 뭐 내 감성이라고 능력이 좋은 건 아니다. 그래, 세상이 원래 끼리끼리 모이는 거지.
  이제 그만 자야할 시간이다. 사실 몇 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까 집 들어올 때 시간이 적어도 이른 것은 아니었으므로 지금 잠 들어도 그리 많은 시간을 잘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밤은 감상적인 시간이다. 알콜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감수성의 홍수가 일어난다. 방을 가득 채운 어둠은 이산화탄소마냥 숨 쉴 때마다 내 의식으로 들어와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가 진해지면 진해질수록 내 의식은 점점 밝은 곳으로 향한다. 밝은 곳은 우리가 익히 아는 희망의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백색의 세계다, 허무의 세계다. 이데아보다도 밝은 세계에서 나는 신보다도 전지전능하다.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은 내가 절대자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신조차 세상을 만드는데 6일이 걸리고 하루를 쉬었다고 하는데 나는 십분 안에 그 모든 것들을 이뤄낼 수 있다. 아니, 단 하나의 단어만으로도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다. ‘만약에.’ 그래서 이 백색의 공간은 만약의 세계가 된다.
  오늘도 나는 이 공간에서 부자가 된다. 어제는 뭐였더라? 세상을 지키는 슈퍼 히어로였던가. 평소에는 힘을 숨기고 살다가 악당들이 나를 무시하는 순간 힘을 보여주고 모든 것을 제압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책임보다는 나의 대단함을 위시하고 싶은 반쪽짜리 히어로였다. 그저께는 뭐였지. 아, 자고 일어났는데 눈을 뜨면 11살의 나로 돌아간 세상이었다. 참 웃긴 것이, 뭐 대단한 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나온 좋은 노래들을 가지고 기획사에 들어가서 작곡가 및 작사가로 활동하면서 떼돈을 버는, 참 지금 생각하니 아주 찌질한 상상이었다. 만약의 세계에서 나는 절대자라고 했는데, 아무리 절대자라도 본판이 이런 작은 인간이어서야 상상조차도 작아지는구나. 다시 한 번 나의 작음을 실감한다. 그래, 오늘은 부자가 되기로 했지. 부자가 되는 건... 결국 로또가 되어야겠지? 근데 로또 1등이 되어도 요즘 강남에 집 한 채 제대로 못 사는데 부자라고 할 수 있나. 그 돈으로 주식투자를 해서 돈을 더 불리는 거지. 어차피 내가 돈을 아무리 불려도 이건희나 정몽준처럼 돈을 모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몇 십억 있으면 뭐 먹고 살 걱정이나 어디 놀러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그러나 상상에서조차 나는 1인자는 될 수 없구나. 니체가 말로써 죽여 버린 신이 내게 묻는다. 너는 절대자라면서. 근데 그 것밖에 못해?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없는 부분이 있는걸. 신이 박장대소한다. 그럼 지금까지 네가 한 상상은 현실적으로 허용된다는 거야? 그 웃기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이? 나는 할 말을 잃고 갈굼 당하는 이등병마냥 멍청하게 서있었다. 젠장, 나중에 상상에서 몇 번 칼로 쑤셔놔야지. 웃음을 멈춘 신이 싸늘하게 미소 지으며 내 어깨를 감싸고 귀에 속삭인다. 내가 지구에서 손 뗀지 몇 만 년 지나서 요즘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딱 하나 아는 게 있어. 니가 지금 실. 패. 자. 라는 거. 나는 고개를 돌려 신을 노려보았다. 얼굴이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아 두 눈을 노려보지는 못 했지만 이렇게 쉽게 나의 모자람을 인정하기는 싫었다. 내가 지금 실패자라는 건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이지? 아직 대학교도 안 나왔는데 어떻게 실패를 해? 난 지금 큰 문제없이 대학 생활 잘 지내고 있는데? 그리고 만약 내가 실패자라고 한다면, 나는 그 실패를 발판 삼아 성공으로 나아가겠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거든. 그러나 내 말이 신의 비웃음을 멈추지는 못 했다. 내가 왜 너를 실패자라고 말했는지는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그리고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나도 굉장히 좋아하는 말이지. 그런데 실패는 절대 혼자서는 성공을 낳지 못 해. 어머니 혼자서 자식을 낳나? 글쎄, 내가 본 너의 실패는 말이야, 안타깝게도 독신주의자 같은걸? 킥킥킥... 네 실패가 낳을 수 있는 건 알에서 깨어날 수 있는 유정란이 아니라 계란 그 이상 그 이하도 안 되는 무정란에 불과하겠지.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지도 않고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21C 뉴욕을 닮은 그 세상에선 아리스토텔레스가 나타나서 자신의 근육을 과시하면서도 시학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세상에 뿌리고 있었다. 곧이어 피타고라스가 나타나 삼각형 자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제갈량이 부채를 한번 휘두르자 동남풍이 불어왔고 뉴턴은 사과를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위로 열심히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파스칼은 공기를 손에 담으려 손을 오므리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말할 때 옆 세상에선 버섯구름이 솟아올랐고 갑자기 뭉게뭉게 천재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그 중 에디슨이 말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 갑자기 천재들의 몸에서 땀이 스멀스멀 나오더니 쓰나미처럼 세상을 뒤덮었다. 흐르는 땀이 지나치는 세상은 모두 녹슬었다. 나는 하늘에서 열심히 역겨움을 토하고 있었지만 내 땀구멍 어느 하나 노폐물을 방출하는 곳은 없었다. 허우적거려도 뒹굴어보아도 녹슨 세상으로 나는 떨어질 수 없었다. 갑자기 아랫배가 살며시 아파왔다. 어찌 손 써볼 새도 없이 퐁, 하고 나온 것은 하나의 계란. 계란은 날개도 없건만 열심히 추락했다. 사하라사막 그 어디쯤 별똥별처럼 떨어지던 계란이 퍼석하고 깨지려는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누리끼리한 천장, 그리고 시끄럽게 진동하는 알람.
 
  아침은 언제나 고단하다. 나는 아침이 항상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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