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와 선배의 만남 충대신문 8기 김수남(국어국문·64) 선배를 만나다

 

 
▲강렬한 눈빛, 중후함이 묻어나오는 헌팅캡. 작가인 김수남 선배의 모습에서 세월의 연륜과 말에 대한 노련함이 엿보였다

   50년 뒤 우리 학교의 모습은 어떨까. 흔히 반세기라고 부르는 50년 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을 예상해보는 것은 아마 모두에게 낯선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50년 전 내가 있는 곳의 모습을 궁금해 해본 적이 있는가. 본지는 올해 창간 60주년을 맞아 본지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자 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충대신문의 60년대를 함께한 충대신문 8기 국어국문학과 64학번 김수남 선배를 만나 충대신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Q1. 충대신문 현직기자와 정확히 50년 차이가 난다. 본지 8기 기자로서 까마득한 64기와의 인터뷰 요청을 받고 어떤 기분이 들었나?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생각한다. 한바탕 어지러운 봄꿈이라는 거다. 우리가 50년 차이라고 그랬는데 인터뷰 요청을 받고 내가 20살이었을 50년 전을 떠올려보니 그 때가 꿈같은 찰나 같았다. 50년 동안 꿈꾸고 눈을 떴더니 찰나의 순간처럼 쓱 지나간 것만 같다.

   Q2. 입사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나?

   정식 입사시험을 봐야 하는 입사시기에 입사하지 못해 신문사에 있는 친구들한테 수필을 부탁 받아 신문에 글을 쓰게 됐다. 그 이후로 원고 청탁이 계속 들어와 여러 번 글을 썼는데 학생들이랑 교수님들의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2학년 때 당시 평론가였던 주간 교수님 요청에 특채로 뽑혀 입사하게 됐다.

   Q3. 그때의 신문구성은 어땠었나?

   지금처럼 8면이 아닌 4면 인쇄를 했다. 1면은 정치에 해당하는 면, 2~3면은 특집기사나 간단한 기사들, 4면은 수필같은 글을 비롯해 문화를 다룬 면으로 돼 있었다. 광고 받기도 힘들어서 4면을 만들면 빈 공간을 둘 곳도 없이 빽빽하게 글을 썼다.

   Q4. 지금은 신문편집과 인쇄가 기계로 자동화 돼 이뤄진다. 그 때는 어떤 방식으로 신문을 편집하고 발행했었나?

   활판인쇄를 했다. 글자가 써있는 납 활자를 하나씩 뽑는 걸 문선이라고 하는데 문선을 한 후에 활자들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는 조판에 놓고, 종이로 한 장 한 장씩 찍었다. 최종 인쇄를 하기 전에 교정지를 뽑아서 글자 교정을 하고 다시 또 문선작업을 해서 조판에 놓고 다시 찍고 그랬다. 거의 수동으로 신문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신문이 종이로 다 인쇄되면 신문사 사람들이 삥 둘러앉아서 신문 가운데를 접고, 신문을 둘러쌀 띠지도 풀칠해서 붙이고, 우체국가서 발송하는 것까지 했다. 그렇게 신문을 만드는 것부터 발송까지 전 과정을 우리가 도맡아 했었다.

   신문 인쇄의 자동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60년대 무렵, 우리 학교는 지금의 유성구 궁동이 아닌 현재 의과대학이 위치한 중구 문화동에 자리해 있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문리대, 법경대, 공대, 농대가 있던,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학교였다.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데모, 유흥 혹은 공부 뿐이었다. 우리 학교 학생들도 문리대 태극정원 안에서 데모와 단식투쟁을 했다. 4학년 한 해만 빼고 해마다 데모를 했던 김수남 선배는 그 시절이 어지러운 때였다고 회상했다. 

   Q5. 과거엔 대학생들이 신문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안다. 당시 본지에 대한 학우들의 관심은 어느 정도 였나?

   학우들이 충대신문을 많이 읽고 관심도 가져줬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어서 신문이 좋은 읽을거리 중 하나였다. 또 지금보다 대학생활이 쳇바퀴 돌아가듯 더 단조롭고 특별한 게 없었다. 지금같은 축제도 없었다. 그래서 특이하고, 색다른 기사를 많이 쓰려고 했다. 때문에 순발력을 갖고 학우들이 흥미롭게 읽을 만한, 주변 이야기를 잘 포착해야 하는 기사를 많이 썼다.

 

 

   Q6. 신문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66년도 11월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응모작을 냈다. 응모 주소를 본가로 하지 않고 충대신문 편집실로 해놨다. 원래 신춘문예 당선 결과는 12월 23, 24일 쯤 나오는데 신문사 편집회의 날이었던 12월 27일까지도 결과가 안 나왔다. 그 날 신문사에 회의를 하러 편집실 복도에 들어섰는데 신문사 경리 분께서 나를 보고 ‘속달로 편지가 하나 왔다’고 말해 줬다. 가서 봤더니 내 신춘문예 소설 응모작인 ‘조부사망급래’가 소설부문으로 당선된 것이다. 신문사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간교수님, 총장님 등 여러분들한테 많은 축하를 받았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당선 통보를 신문사에서 받았던 게 나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다.

   1966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된 사실을 알았던 날, 김수남 선배에게 신문사는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곳이 됐다. 우연히 신문에 수필을 쓰게 됐고 또 우연히 신문사 사람들의 권유로 쓴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됐던 것이다. 그렇기에 신문사는 그가 “나의 문학생활이 시작된 장소”라고 말할 정도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Q7. 학보사 기자의 경험이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도움이 됐었나?

   1971년 5년제 농업전문학교(현 우송대)에 교수로 재직할 무렵, 학교의 첫 교지를 만들게 됐다. 신문사에서 신문편집하고 기사의 소재를 찾고 글을 썼던 편집 과정들이 교지를 내는 동안 아주 많은 도움이 됐다. 편집은 물론이고 혁신적으로 판형과 제호까지 바꿔서 좋은 평을 많이 받았다. 성모여고에 선생님으로 있을 때도 성모여고 36년 역사를 다룬 책을 혼자 만들었고, 이후에도 여러 책을 만들었다. 신문사 시절의 편집 경험이 훗날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고 책을 보는 안목도 길러줬다.


   Q8. 마지막으로 현재 신문사를 이끌어 가고 있는 현직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신문은 대학의 얼굴이다. 얼굴을 잘 꾸며야 하고 홀대하면 안 된다. 안 좋은 건 질책도 하고 좋은 건 격려도 하면서 신문이 나의 동반자라는 생각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독서도 계획을 세워서 많이 해야 한다. 잘못된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만 보지 말고 책을 읽어야 한다.
또 기자는 역사 의식을 가져야한다. 우리 역사가 담긴 시인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의 내용을 보면 역사 의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기자들도 책을 많이 읽으면서 올바른 역사 의식을 길러가는 게 무척 중요하다.

   김수남 선배는 지금 충대신문은 “사나흘 쯤 굶어서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 같다”라며“신문사 복지에 더 힘쓰고 좋은 여건을 마련해 타 대학의 질 좋은 신문들 못지 않은 신문이 나와야 한다”고 신문사와 현직 기자들을 향해 따끔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일흔의 연세에도 인터뷰를 끝내고 탁구를 치러 가야 한다며 배웅해주던 정정한 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선배님의 말처럼 우리 신문도 지난 반세기를 반추하며 앞으로는 학우들의 관심과 외침에 항상 깨어있는 충남대의 대표언론으로 나아갈 때이다.


글/ 이예원 기자 wownow@cnu.ac.kr
사진/ 충대신문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