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노래

 
  할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 되던 해 여름날 밤에 돌아가셨다. 두 해 가까이 누워 지내다, 장마가 한참 지난 푸릇푸릇한 여름 밤, 조용하고 깊은 잠에 들 듯 당신이 평생의 밤을 보내온 방에서 홑겹으로 된 여름이불을 덮은 채 가만히 눈을 감은 것이다. 그날 밤 할머니가 그의 마지막 곁을 지켰다. 소식을 들은 다른 가족들은 새벽 즈음 함께 했고 멀리 있던 나는 오전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당시 나는 서울에 있었는데 동틀 무렵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는, 오촌 아저씨의 차를 얻어 타고 할아버지네 집으로 내려갔었다.

  화장실에 들르려고 휴게소에 차를 잠깐 세웠을 때 말고는,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조수석에 기대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특별히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몰려온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정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날이 가까워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고, 보름 전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와 마주했을 때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둔 까닭이기도 했다. 그때의 그는 몇 차례의 수술과 계속된 치료로 많이 야위긴 했어도, 불행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었다. 가만히 앉아 마당 건너편의 구릉을 바라보던 그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눈동자만은 어느 때 보다 맑고 너그러웠다. 그 눈을 마주하며 오히려 내가 깊은 위안 같은 것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것은 죽음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리고 한 삶의 시작과 마무리에 관한 일이기도 했다. 바로 어제 저녁까지도 살아 숨 쉬고 있던 그가 이번 생의 마지막에 가 닿은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툇마루에 걸터앉아 마당너머로 보이는 해질녘 광경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실 수 없게 되었다. 왠지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아직 초등학생인 나를 마루에 앉히고는 유리로 된 사이다 컵에 막걸리를 척 따르던 그의 손이 떠올랐다. 애한테 그런 걸 왜 주느냐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푸성귀인 냥 곱게 쓰다듬고는 당신 컵에 가득 담겨있던 막걸리를 달게 집어 들던 바로 그 손이기도 했다. 마르고 투박하기는 해도 고된 노동의 책임을 아는, 튼튼하고 정직한 손이었다.

  이런저런 장면들이 떠오르는 동안 눈을 감지라도 않으면 자꾸 붉어지는 눈두덩이 더 달아오를 것 같았다. 입도 벌리지 않은 채 몇 번이나 침으로 목을 축였다. 운전석 창 위쪽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해가 감은 눈 속에 벌겋게 퍼졌다. 살아가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가까이 맞물려 있지만, 끝내 서로의 앞 얼굴은 보여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몹시도 서글펐다.

  그런 와중에도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눈을 뜨고 창문을 조금 내렸다. 그 틈 사이로 부딪는 공기들이 큰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아주 조용한 공간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겨울 밤 이불을 찾아 기어들듯, 나는 눈을 뜬 채 빠르고 자연스럽게 묘연한 꿈과 같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상하게 그곳은 평화로웠지만, 하루에 두 번씩 해가 지는 외로운 마을이었다. 섬인지 숲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아주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다. 그런 곳에 벙벙히 선 내가 우스웠다. 나는 여전히 죽음을 몰랐고, 삶에 어설프게 매달린 가엾은 존재였다. 가까운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맞닥뜨리고도 어느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이 외로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죽음보다 외로운 것은 삶이었다. 나는 서둘러 꿈속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아는 그는 무뚝뚝했다. 그리고 자장면과 문어숙회를 유달리 좋아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멀리 해가지는 광경을 보며 막걸리를 마시는 것이 하루의 낙이었고,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에서 동네 사람들과 고기를 나눠 굽는 것은 한 계절의 기쁨이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해 글은 전혀 몰랐지만 숫자에는 밝았으며, 내가 아는 한 그 마을에서 가장 고지식하게 일하는 농부였다. 생산율이 낮더라도 결코 농약을 치는 법이 없었다. 그 덕분에 매년 우리 식구는 농약 한번 맞지 않은 햅쌀을 끼니마다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가진 기억이란 것은 그가 나의 할아버지로 살았던 이십년 동안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그의 삶을 온전히 살피지 못했다. 그는 분명 나 이전의 삶을 살았다. 처음부터 나의 할아버지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를 달구지에 태워 강가로 나가던 그의 뒷모습은 알지만, 그가 어렸을 때 그 강에서 해가 저물도록 물고기를 낚았을 모습은 알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담도 없는 덩그런 와옥 마당에서 혼례를 치르며 그는 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한때 소년이었고, 청년이었다. 그가 지금의 나와 같은 청년이었을 때 가슴에 품었던 꿈을 아마 나는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삼일장이 끝나고 발인이 있던 날 아침부터 부슬대던 비는 오후가 되자 장대처럼 쏟아져 내렸다. 길이 좁은 시골마을이라 영구차도 들일 수 없어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었다. 맨 앞에 선 나는 장지로 가는 길을 잡았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야트막한 산길을 둘러 걷는 동안 마침 내리는 빗속에 숨어 실컷 울었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눈물과 빗물을 닦아가며 아주 오래도록 울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위한 울음이 아니었다. 나는 결코 나를 위해 울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만을 슬퍼해 울어야 할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내가 알지 못했던 그의 삶을 내가 아는 그의 삶과 이어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울어야 했다. 그렇게 흘려낸 눈물은 내가 비록 그의 이전 삶에 속하지는 못했더라도, 어느 시기에 이르러 그의 인생을 드문드문 더듬으며 흘려야 할 헌화와 같은 눈물이었다.

  상여꾼들의 상엿소리 사이로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오래된 노래가 떠올랐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나머지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아 그 구절만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떠올렸다. 주의 깊게 듣지 않았던 것을 조금 후회했다. 상엿소리가 높아지고 낮아질 때 마다 걸음은 빨라지고 느려졌다. 그렇게 한참을 더 걸었다.
  어느새 빗줄기는 약해져있었다. 이제 장지가 눈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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